#북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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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도로와 수레가 좋다면 조선은 가난하지 않을 것"…실학자 박제가가 《북학의》에 남긴 물류·상업論
우리나라는 동서 간 거리가 1000리고 남북은 그것의 세 배가 된다. 그 가운데 서울이 있기 때문에 사방에서 서울로 물자가 모여드는 데는 실제로 동서 500리, 남북 1000리에 불과하다. (중략)사람들이 왜 이렇게 가난한가? 단언하건대 그것은 수레가 없기 때문이다. 전주의 장사꾼은 생강과 참빗을 짊어지고 의주까지 간다.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걷느라 모든 근력이 다 빠진다. 원산에서 미역과 마른 생선을 싣고 왔다가 사흘 만에 다 팔면 적은 이익이나마 생긴다. 하지만 닷새가 걸리면 본전만 하게 되고, 열흘이나 머물면 오히려 본전이 크게 줄어든다. (중략)영동 지방의 경우 꿀은 생산되나 소금이 없고, 평안도 관선에서 철은 생산되나 감귤이 없으며, 함경도는 삼이 흔해도 무명은 귀하다. 산골에는 붉은 팥이 흔하고, 해변에는 생선젓과 메기가 흔하다. 영남 지방에선 명지(좋은 종이)를 생산하고 청산과 보은에는 대추가 많이 나고, 강화에는 감이 많다. 백성들은 이런 물자를 서로 이용하여 풍족하게 쓰고 싶어도 힘이 미치지 않는다. 우리가 가난한 것은 수레가 없기 때문이다. (중략)홍대용은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닦으려면 토지 몇 결은 없어지겠지만 수레를 사용해서 얻는 이익이 그것을 넉넉히 보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수레는 오르막은 꺼리지 않지만 빠지는 곳은 꺼린다. 지금 저잣거리의 작은 도랑은 반드시 복개해서 지하로 흐르도록 하고, 세로로 걸쳐 놓은 나무다리는 모두 가로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 (중략)우리나라는 배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다. 물이나 빗물이 새어드는 것도 막지 못한다. 짐을 많이 싣지 못하고 배에 탄 사람도 편하지 않다. 말을 배에 태울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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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면 도덕이 무엇이 중요한가"…거래와 분업·이익의 중요성 강조한 '조선판 국부론'
“재물은 우물과 같다. 쓸수록 자꾸 가득 차고,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 지금 나라 안에는 비단을 입지 않으므로 비단 짜는 사람이 없다. 따라서 여공(女工)이 쇠했으며, 장인이 없어졌다. 이용할 줄 모르니 생산할 줄 모르고, 결국 모두가 가난해져 서로 도울 길이 없다.”조선 실학자 박제가(1750~1815)의 《북학의(北學議)》는 네 차례에 걸쳐 청나라의 풍속과 제도를 살펴본 뒤 쓴 책이다. 조선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꿈꾸며 개혁과 개방 청사진을 담았다. 성리학이 나라의 사상적 근간이던 시절 그는 상업과 유통, 대외무역의 중요성 등 경제 논리를 강조했다.제대로 된 경제 구조를 갖추지 못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조선의 현실을 비판했다. 발상을 바꾸자는 것이었다. 소비를 진작하고 생산을 증진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자고 주장했다. 그는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도덕이 무엇이 중요한가”라고 의문을 제기한 뒤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나라를 강성하게 하는 것을 학자가 추구해야 할 목표로 제시했다. 일종의 ‘조선판 국부론(國富論)’이다.서문에서 조선의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했다. 그는 “지금 나라의 큰 병폐는 가난”이라며 “대궐의 큰 뜰에서 의식을 거행할 때 거적때기를 깔고 있다. 궁문을 지키는 수비병마저 새끼줄로 띠를 만들어 매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가난을 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외국과의 통상을 활성화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와는 쇄국에 가까울 정도로 교역이 미미했다. 청나라와도 해로를 통한 교역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육로도 교역 물품 제한이 많아 ‘봇짐장사’ 수준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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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선진국인 청나라를 배우자는 조선의 '국부론'…북학파 지식인으로 기술혁신과 무역 강조했죠
청나라를 무찌르자?잘 알려진 대로 박제가는 서자 출신 지식인이었다. 재주는 뛰어났지만 평생을 서자 신분으로 설움을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사실 북학파에 속한 학자들은 유난히 서자 출신이 많았는데 박제가를 제외하고도 유득공이나 이덕무가 그랬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당대 지식인들이 감히 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주장을 많이 했다.북학이란 북쪽 나라의 학문, 즉 청나라를 배우자는 이야기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그 당시 선진국이었던 청나라를 배우자는 말이 뭐가 파격적이냐고 하겠지만 박제가가 살았던 조선 후기 사회에선 꼭 그렇지도 않았다. 정묘년과 병자년의 전란을 겪은 뒤 조선 지식인 사회에선 반청(反淸) 사상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북학파는 비록 오랑캐라고 할지라도 법과 제도가 우수하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학의》에는 “중국을 배우자”는 표현이 스무 번쯤 반복해 나온다. 당시 조선 사대부들을 지배하던 관념이었던 북벌론에 맞서 북학론을 제시한 것이다. 청나라는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배워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념과 명분에 사로잡혀 나라를 그르칠 게 아니라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아내자는 주장이었다.파격적인 주장박제가의 생각은 북학파 중에서도 단연 파격적이었다. 그는 동료 사대부들을 두고 ‘우물 안 개구리’ ‘나라의 좀벌레’라며 힐난했다. 관상감(천문대)을 관리하는 기관 수장을 해당 분야의 지식이 있는 서양인으로 하자는 주장도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기상청장을 외국인으로 쓰자는 격이니 조선 사대부들이 얼마나 어안이 벙벙했을까 싶다.중국 문명에 뒤처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