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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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한국인이 일본·이슬람 역사 잘 모르는 까닭은
한국인들이 비정상적으로 무지한 종목이 두 개 있다. 일본 역사와 이슬람 문명이다. 몇 해 전 오사카에 벚꽃 구경을 갔을 때다. 오사카성을 둘러보던 일행 중 한 사람이 물었다. “여기는 누가 살던 곳인가요?” 그런 걸 대체 어떻게 알겠느냐는 듯 누군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아마 지체 높은 귀족이 살았겠지요.” 잠시 망설였다. 타인의 무지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이다. 성의 주인이 누구고 임진왜란 이후 패권 쟁탈전 때 포격으로 완파되었다가 누가 재건했다는 얘기를 들려주면 면전에서야 “와, 대단하다” 하겠지만 속으로는 “재수 없는 놈, 잘난 척은” 하며 분위기가 냉랭해질 것이다. 원칙을 지킨 덕에 투어는 내내 평온했다.그분들은 평생 산간벽지에서 농사를 지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니다. 최고 학부를 마쳤고 심지어 명예퇴직이라는 제도까지 있는 직장을 다닌 분들이다. 그런 분들이 오사카 성주를 모른다는 건 일본에 대한 우리 교육이 얼마나 엉망인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일본 역사에 대해 우리가 가장 많이 배우는 건 그들의 개화기와 근대다. 이유는 그게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메이지이신을 하고 체력을 기른 다음 조선을 잡아먹었기 때문이다(명칭도 그렇다. 명치유신(明治維新)이거나 메이지이신이지 메이지유신이라는 짬뽕은 대체 뭐란 말인가).반일(反日)의 기원 … 뭐가 됐든 지일(知日)이 먼저한국에서 반일이 정치적으로 활용된 건 최근의 일이 아니다. “나는 일본과 한국에 정상적인 통상 관계가 재확립되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과거를 망각해야 할 것이며 또한 망각할 것이다.” 누가 한 말일까. 이승만이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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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무슬림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한 이슬람율법…이교도 잡아 노예로 만들며 인신매매 시장 확대
중세 중동 지역경제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농업이었다. 하지만 교역에서의 위상은 달랐다. 농산물은 대부분 자가소비용이었다. 농산물은 상하기 쉬웠고 부피는 컸으며, 이윤은 적어 장거리 교역에 적합하지 않았다. 교역품목에서 중동지역을 대표한 것은 직물(textile)이었다. 당시 중동산 직물이 유럽에 대량 수출된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주요 직물제품 명칭은 중동 지방의 주요 도시명에서 나왔다. 모술에서 모슬린(muslin)이, 다마스쿠스에서 다마스크(damask)가 유래했다. 직물 관련 용어들에도 이슬람 세계의 흔적은 남아 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거즈(gauze)는 아랍어 ‘qazz’에서 나왔다. 앙고라 산양에서 채취한 모섬유 모헤어(mohair)는 ‘mukhayyar’라는 아랍어 단어에서 출발했다. 치밀한 조직의 평직물을 가리키는 ‘태피터(taffieta)’ 같은 전문용어도 페르시아어 ‘taftah’가 근원이다. 직물·비단·후추는 주요 중동 교역품중동지역 정착 농민들은 직물업자들에게 아마와 목면을 제공했고, 유목민은 양모와 가죽 공급원이 됐다. 다만 직물산업의 주요 원료였던 목재만은 언제나 부족해서 비싼 값에 외부에서 수입해야 했다. 직물생산은 대부분 가내수공업 형태로 생산자 자신의 필요와 지역 내 수요를 맞추는 수준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직물 제조업자들은 태피스트리와 쿠션, 의복, 각종 복식품을 함께 만들었고 그중 일부는 수출됐다. 이집트 지역에 들어섰던 수많은 왕조는 설탕 제조 노동자와 함께 아마 채취 노동자에게도 국가가 일당을 지급하는 등 적극적으로 직물산업에 개입하기도 했다.알레포나 알렉산드리아 같은 이슬람권 주요 교역항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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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중앙아시아를 떨게 한 고구려 출신 부대…끝내 모함에 몰린 '유민 2세대'의 좌절
8세기 당나라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국제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숙적인 투르크(돌궐)는 망했다가 다시 성장하는 중이었고, 서남쪽의 고산 지대에서는 토번(현 티베트)이 강력한 나라로 성장했다. 아라비아 지역에서는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라센 제국이 중앙아시아로 접근해왔다. 사라센 제국과 토번은 동맹을 맺고, 당나라를 남쪽과 서쪽에서 압박했다. 당나라는 토번과 전쟁을 불사했고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에게 토번의 배후지역을 공격하게 했다.고선지는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단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출발해 타클라마칸을 횡단했다. 그 속에는 용맹스러우며 싸움을 잘한다고 평가되는 고구려 병사들이 다수 포함됐다. 고선지는 평균 높이가 5000m가 넘는 파미르 고원을 건너 100일 동안을 행군한 끝에 오식닉국(현재 시그난 지방)을 급습했다. 연운보 전투를 벌여 적군 5000명을 죽이고, 1000명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1000마리의 말과 무기 등을 노획했다. 72개 소국 점령한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그런데 그는 지친 병사들을 남겨둔 채 3일 동안 더 고산을 진군한 끝에 마침내 토번의 거점인 탄구령 정상에 도달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힌두쿠시(興都庫什) 산맥을 마침내 넘은 것이다. 고선지 장군의 군대는 까마득하게 보이는 계곡을 내려가 소발률국의 수도를 점령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실현시킨 세계 전사에 길이 빛나는 작전이었다. 그는 72개의 소국들에게 항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재빠르게 다가오는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했다. 그의 명성과 고구려 부대의 강인함은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체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시기와 질투 때문에 승리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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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누구나 고기를 먹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소는 중요하고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그러나 농부가 트랙터, 경운기 역할을 하는 소를 잡아먹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소를 잡더라도 고기를 장기간 보관할 수도 없었다.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인간을 ‘빵을 먹는 존재’로 정의했듯이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곡물을 경작(cultivate)해 빵을 만드는 것이 곧 문화(culture)이자 문명이었다. 유럽 북부의 게르만족, 켈트족 등이 즐기는 육식은 야만으로 간주됐다.소는 식용으로 거의 키우지 않았다. 초지가 부족해 종일 풀을 뜯는 소를 고기로 먹는 것이 비경제적이었던 탓이다. 그래도 영양 보충을 위한 육식은 필수였다. 로마시대 상류층의 연회에서는 주로 돼지나 양, 닭, 오리 등의 고기를 먹었다. 대다수 평민은 ‘빵과 서커스’ 정책에 따라 무상으로 돼지고기와 기름이 배급될 때나 맛볼 수 있었다.육식은 게르만족이 지배계급으로 올라선 중세에도 선호됐다. 특히 프랑크왕국에서는 육식 금지가 무장해제와 동일한 처벌로 간주됐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기, 특히 소고기는 여전히 왕과 귀족이나 먹는 귀한 음식이었다. 농노들은 어쩌다 고기가 생기면 스프나 스튜로 먹었을 뿐 주식은 빵이었다. 그나마 해마다 곡식을 모두 소진한 늦겨울과 아직 덜 자란 한여름에는 굶주림이 되풀이됐다.15세기 말 대항해시대도 소고기와 연관이 있다. 모험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먼바다로 나간 것은 이슬람 세력에 의해 막힌 후추 수입항로 개척이 주목적이었다. 냉동 냉장기술이 없어 고기 부패를 막고 풍미를 살리는 후추 등 향신료가 필수였기 때문이다. 소고기, 음식에서 요리로고기를 불에 구은 스테이크는 본래 북유럽의 거친 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