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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구려 영토와 부여의 풍속 계승한 '황제국' 발해…중국·일본 옛 기록도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 서술

    나라가 망해 포로가 돼서도 굴복하지 않은 채 30년 동안 기회를 노리다가 복국(復國)의 희망을 안고 대탈출을 감행한 발해인들. 2000여 리(里·800여㎞) 길에 겪은 고생도 그렇지만, 그 마음과 꿈을 떠올리면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2002년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東北工程: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을 추진하면서 고구려를 중국 역사로 변조하고, 발해를 말갈인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은 모든 박물관, 전시관, 역사책, 교과서에서 ‘발해’를 지웠으며, 때때로 ‘발해도독부(都督府)’라고 서술한다. 첫 국호는 ‘고려’로 추정발해는 우리의 역사인가? 중국의 역사인가? 발해의 고구려 정통성과 한민족 계열성은 국호와 주민들 성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727년에 2대 무왕은 유민들의 상황을 살펴보고, 국교를 수립할 목적으로 일본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하이(아이누족) 땅에 표착한 24명 가운데 수령인 고제덕 등 8명만 생존했다. 갖고 간 국서(國書)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3대 문왕이 보낸 국서에도 ‘고(구)려의 왕 대흠무가 말한다…’고 썼다. 일본 또한 ‘발해는 옛날 고구려다’고 기록했으며(《속일본기》), 발해에 파견한 사신을 ‘고려사’라고 불렀다. 초기에 파견한 사신단에는 유민으로 정착한 ‘고려씨’들이 포함됐고, 당시 목간이나 그릇, 파편 등에는 ‘고려’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중국과 신라 기록에는 ‘진(振·震)’ ‘발해’ ‘북국’ 등의 용어가

  • 과학과 놀자

    고려시대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볼 수 있었던 황홀한 오로라…지구 대기를 교란시켜 통신과 GPS에 영향 주기도

    옛날 옛적 멀고 먼 나라에 살던 왕과 왕비가 오랜 기다림 끝에 공주를 얻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생일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마법사가 공주에게 물레에 찔려 죽는다는 무시무시한 마법을 걸었으나 착한 마법사의 도움으로 죽음 대신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이 이야기는 그림 동화로 디즈니 만화영화로도 제작된 '잠자는 숲속의 공주'다. 공주의 이름은 바로 오로라, 로마신화에서 새벽의 여신이다. 하늘을 가로질러 너울거리는 빛의 향연일생에 한 번은 보고 싶다는 자연 현상인 오로라도 이 새벽 여신의 이름을 따랐다. 하늘을 가로질러 너울거리는 빛의 향연을 보기 위해 세계 사람들이 캐나다 옐로나이프에 모인다. 운이 좋으면 도착한 당일에도 볼 수 있지만, 며칠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주하는 신비한 ‘초록 커튼’은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될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으로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는 지금, 우리는 언제쯤 오로라를 볼 수 있을까? 오로라는 초록색일까오로라는 높은 에너지를 가지는 하전입자(전하를 띤 입자)가 자기력선을 따라 지구 대기로 들어오면서 대기 성분과 부딪쳐 빛을 방출하는 일종의 방전 현상이다. 오로라가 발생하는 지구 고층 대기는 주로 산소 원자와 질소 분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이 전자와 충돌해 들뜨게 되고 다시 바닥 상태로 천이하면서 방출하는 빛이 바로 오로라다.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는 전자는 질소 분자를 이온화하며 지상에서 약 90㎞ 상공까지 떨어지는데 이곳이 오로라의 끝자락이다. 산소 원자는 에너지 준위에 따라 붉은색과 초록색 빛을 방출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倭의 침공 맞서 해양력 강화한 신라…삼국통일의 토대 쌓았다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시마네(島根)현, 돗토리(鳥取)현, 후쿠이(福井)현 지역에서는 우리, 특히 신라계와 연관된 유적과 유물, 이야기는 물론이고, ‘시라기(신라)’라는 지명도 많이 남아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실린 신라 왕자인 ‘아메노히보코(天日槍(천일창) 또는 天之日矛(천지일모))’가 8개(또는 7개)의 보물을 갖고 도착해 활동한 지역들이다. 일본 신화에서 가야계인 태양여신과 격돌을 벌인 해양과 폭풍의 신인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신라계다. 그는 패배한 뒤 근국(뿌리 나라)인 신라로 돌아갔다. 또 다른 기록에는 그가 신라국에서 흙배를 타고 이즈모에 내려왔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계의 일본 진출시마네현 이즈모의 고진타니 유적에서는 358개의 청동칼이 나왔고, 청동창, 동탁(제사용 방울) 등의 금속제품들이 출토됐다. 신라에서 제철(製鐵) 집단이 진출했고, 이들이 철광산을 발견하면서 대량으로 무기와 농기구를 생산했으며, 거대한 고분군들이 증명하듯 소국들을 세웠다. 결국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시마네현 주민들은 신라인 피가 많이 섞여 있는 것이다.그런데 <삼국사기>는 왜인의 침입은 상세하게(?) 기록한 반면 신라인의 진출은 기록을 안 해서 결과적으로 역사와 자존심을 왜곡시켰다. 다행스럽게도 <삼국유사>에는 157년에 근오기(영일만)에 거주하던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바위’를 타고 동해를 건너가 일본 땅에서 소국의 왕과 왕비가 됐다는 기록이 있다. 아름답고 신비한 사연이 담긴 이 신화는 중앙정부와 갈등을 일으킨 ‘해와 달’을 숭배하는 제사 집단이 혼슈 남부의 이즈모 지역으로 진출했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구려의 계속된 영토 확장은 '원조선 회복 전쟁'…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했다

    ‘원조선 회복’ 나선 고구려<삼국유사>는 왕력 편에 ‘주몽은 단군의 아들(朱蒙…鄒蒙 壇君之子)’이라고 기술했고, <수서>를 비롯한 여러 책에도 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라는 글이 있다. <삼국사기>에도 247년조에 ‘평양은 본래 선인인 왕검이 있었던 곳(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이라고 적어 원조선이 고구려와 특별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는 또 주몽이 벌인 정복사업들을 기록하면서 ‘다물려어위복구토(多勿麗語謂復舊土)’라고 평가했다. ‘다물’은 고구려 말인데, 옛 땅(구토)을 수복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옛 질서와 체제를 회복한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건국 당시부터 원조선의 질서를 회복하고 옛 영토를 수복하는 일을 일종의 국시로 삼은 것이다.끊임없이 진행한 정복전쟁고구려는 초기부터 백두산 주변에 있는 행인국, 동해북부와 연해주에 걸쳐 있는 북옥저 등을 정복했다. 뒤를 이은 임금들도 양맥·개마·구다·동옥저·갈사·조나·주나 등 크고 작은 소국을 병합했다. 대체로 백두산 지역, 압록강 남쪽 지역, 동해안 일대, 연해주 일대, 그리고 중만주의 부여 영토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한편 대외전쟁을 펼쳐 2대 유리왕 때부터 북쪽의 선비족을 공격하고, 한나라가 남겨둔 잔존 세력들을 몰아냈다. 5대 모본왕은 서기 49년에 요동지방과 요서지방을 지나 현재의 베이징 근처와 그 이북인 북평·어양·상곡·태원 등을 공격했다. 뒤이어 6대 태조대왕은 요서지방에 10성을 쌓아 관리지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대 광개토태왕은 22년간 재위하며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