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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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양반의 손·발이자 세습재산의 핵심 '노비'…'乙' 노비 이탈은 '甲' 양반의 경제에 타격
“(노비인) 송노 분개 복지 등에게 율무밭의 제초를 하게 하고 좁쌀 밭의 김매기도 시켰다. 그런데 도중에 소나기가 내려 좁쌀 밭의 제초를 다 하지 못했다. 그런데 율무밭 둑에 (다른 노비인) 한복을 시켜 찰수수 한 되의 종자를 심게 했는데, 겨우 한 두둑을 심었을 뿐이다. 그나마 그 싹도 듬성듬성 자랐다. 필시 한복이 그 종자를 훔쳐 자기 밭에 뿌렸을 것이다.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인가. 도대체 우리 집 전답은 모두 한복이 씨를 뿌렸는데, 싹이 나는 것을 보면 드문드문 파종을 했다. 생각건대 이 종자도 한복이 훔쳐 자기 밭에 뿌렸을 것이다. 분통이 난다.”임진왜란 당시 양반이었던 오희문이 전란 사실을 기록한 피란일기 ‘쇄미록’에는 당시 사회의 갑이라 할 수 있는 양반과 전형적인 을인 노비 간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구절이 적지 않다. 오희문이 남긴 1595년 5월 18일 일기의 한 구절도 그렇다. 노비는 인격적으론 자유가 없었지만 자기 토지를 소유하면서 주인의 곡식 종자를 몰래 빼내 자신의 밭에 심었다. 증거가 없는 주인은 발만 동동 구를 뿐 만년 을로 갖가지 궂은 일에 동원됐던 노비가 갑에게 소심하면서도 확실한 복수를 한 셈이다. 게으르고 부정한 노비 때문에 속 태우는 양반‘쇄미록’ 곳곳에는 노비들의 게으름과 부정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가득하다. 노비를 이용한 농사일은 효율이 낮았다. 또 직접 상거래에 나서지 못하는 양반들이 시장에서 노비를 거쳐 물건을 사고팔 때 중간에 새는 물건도 적지 않았고, 가격을 허위로 보고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조선 전기 양반들에게 중요한 경제적 원천은 노비와 토지에서 파생되는 수입이었다. 토지 경작에는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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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농촌 양반은 다수 노비를 이용해 농장 운영했죠…가작·작개·어우리 등 농장경영방식별로 대가 달라
농촌 양반의 경제적 기반은 대규모 노비와 토지에 있었다. 15~16세기 남부지방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농지 개간은 다량의 노비 노동을 동원한 양반에 의해 주도됐다. 그리 높지 않은 산과 깊지 않은 계곡에 있는 완만한 기울기의 구릉이 개간의 주요 대상이었다.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는 계간(溪澗)의 물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적지가 아니었다. 홍수의 위험에 노출된 천변 평야도 마찬가지였다.보나 제언을 쌓아 개간농촌 양반은 개간의 적지를 골라 제언을 쌓거나 보(洑)를 개설해 논으로 일궜다. 16세기 경상도 북부지방의 양반가에 전하는 20여 종의 상속문서에 따르면 노비 재산의 규모는 적더라도 50명을 넘는 게 보통이며 많게는 300명을 초과했다. 토지 재산의 분포는 더욱 다양한데, 적더라도 200두락(斗落)이며 최대는 2312두락에 달했다. 두락이란 1말(斗)의 종자를 파종하는 면적을 말하는데, 16세기에는 100~120평이었다(1평=3.3㎡). 노비와 토지 재산의 규모는 상속주의 지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상속주가 중앙정부의 관료 출신이거나 그의 아들이면 재산의 규모는 월등했다.농장은 분산됐어요양반이 노비 노동을 이용해 토지를 경작한 농사의 단위를 가리켜 농장(農庄)이라 했다. 얕은 야산으로 둘러싸인 동(洞)이나 곡(谷)이 농장의 중심을 이뤘다. 동의 가장 안쪽 높은 곳에 기와로 지붕을 인 양반의 저택이 자리잡는다. 그 아래로 좌우 야산 기슭을 타고 노비들의 집이 배치된다. 노비 집의 다수는 여전히 반지하 움집이다. 동 안에는 배추, 무 등 부식 재료와 면화, 마, 저, 칠 등 가내공업의 원료를 위한 채마밭이 조성된다. 동 밖으로는 넓게 펼쳐진 들이다.제시된 그림은 16세기 경상도 풍산현 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