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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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53) 중국 문명 이야기
■기억해 주세요^^明나라는 淸나라보다 영토는 작았지만, 관습, 언어, 인종 등이 훨씬 더 ‘중국적’이었다. 오늘날 중국 영토의 많은 부분은 청나라 때 비로소 중국의 영역으로 들어온 지역이다.중국은 문명이다. 국가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인구가 많고 영역도 넓다. 서쪽 신장지구의 터키계 이슬람 신도들과 불교 및 내세를 믿는 티베트 주민들, 농경문화와는 거의 접점이 없는 유목민들이 모두 ‘중국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런 상황에서는 효율적인 통치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삶의 양식이 완전히 다른 민족들이 ‘한 나라’로 묶여있기 때문이다.한족으로 동질화가 가능한가중국 문제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정치학자 로스 테릴(Ross Terrill)에 따르면 현재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단일성’에 집착한다. 동일한 역사와 동일한 풍습이 있다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를 사실로 포장한다. 예컨대 동서로 네 시간의 시차가 나는 데도 중국 정부는 단일 시간대를 고수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티베트 사람들은 베이징의 시간에 맞춰 ‘새벽 세 시’를 ‘아침 일곱 시’로 인정해야만 한다.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정보가 없고, 중앙정부가 힘으로 각 지역을 누를 수 있다면 중국은 갈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 모든 지역의 정보교류와 경제교류 총량이 빠르게 늘어났다는 점이다. 과거의 방식은 거의 수명이 다 했다. 그렇다면 중국이 미래에 선택할 수 있는 대내 전략은 무엇일까. 첫째, 연방제 국가로 거듭나는 것이다. 법에 의거해 문화적 인종적 소수파에게 보다 너른 권리를 부여하는 방안이다. 각 지역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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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51) 나이팅게일, 병원을 혁신하다
■기억해 주세요^^나이팅게일은 환자 사이의 최소 거리 유지, 간호사 1명당 최대 환자의 수(12명), 병실내 온도 습도의 조절 등을 처음 시도했어요.‘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1820~1910)은 누구나 안다. 그가 간호학의 창시자라는 것도 일반 상식이다. 1893년 제정돼 간호학도들이 맹세하는 ‘나이팅게일 선서(Nightingale Pledge)’도 유명하다. 하지만 ‘간호학’이 인류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기에 나이팅게일의 이름이 불멸의 명성을 획득했을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부유한 영국 상류층의 딸로 태어났다. 이름 ‘플로렌스’는 피렌체의 영국식 발음이다. 언니 파세노프도 이탈리아 출생인데, ‘파세노프’는 나폴리의 그리스식 이름이다. ‘나폴리’는 그리스어 사투리로, ‘새로운 도시’라는 뜻이다.간호학을 창시한 여전사나이팅게일은 신의 소명을 받았다며, 어린 시절부터 본인의 천직을 간호사라고 주장했다. 당시의 간호사는 ‘병원이라는 특수공간에서 일하는 하녀와 청소부’ 정도의 이미지였다. 상류층 여성이 지원하는 직업이 아니었다. 나이팅게일은 이러한 사회적 편견을 깼다. 나이팅게일의 진정한 업적은 이것이 아니다. 1853년부터 1856년까지 크림반도에서 크림전쟁(제1차 동방전쟁)이 벌어진다. 러시아제국에 맞서 오스만제국, 영국, 프랑스, 사르데나 공국 등이 연합전선을 편 전쟁이다.병원의 더러운 붕대, 시트가 더 문제30대 중반의 독신 여성(당시로서는 매우 예외적인 일이다. 나이팅게일은 평생을 독신으로 시종했다) 간호사로 참전한 나이팅게일은 이스탄불 야전병원장으로 활동하며 영국군 부상병의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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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49) 인물에 대한 평가는 사실인가?
■ 체크 포인트범죄자, 사기꾼이었던 사람이 형사로 맹활약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역사는 단순하지 않다. 아돌프 히틀러처럼 어떤 기준을 적용해도 악인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 인물들의 생애는 선악으로 선명하게 나눠지지 않는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특정 사건, 사건이 벌어진 배경, 당시의 역사적 전후 사정을 입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그래서 어렵다. 프랑수아 비도크(E. F. Vidocq: 1775~1857)라는 인물이 있다. 프랑스 대혁명 시절 군복무를 마친 비도크는 탈영병이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된다. 교도소에서는 위조지폐 제조의 죄명이 더해져 사기 혐의로 중노동형을 선고받는다. 10여 년 동안 탈옥과 체포를 거듭하면서 형량이 늘어났는데, 그 과정에서 비도크는 범죄자들을 통해 뒷골목의 정보, 범죄수법에 통달했을 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변장의 달인이 된다.감방에 수감된 비도크…절도사건 해결그의 인생 반전은 1810년 같은 감방 수감자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활용해 경찰에 정보를 전달한 사건이다. 연쇄 절도에 시달리던 경찰에게 특정 거리를 지목하며 가보라고 한 것이다. 사건은 해결되었다. 깜짝 놀란 경찰들에게 비도크는 ‘범죄자들에게는 독창성이 없다. 한 번 사용한 범죄 방식을 다시 쓰고, 한 번 안전하다고 믿은 아지트를 다시 사용한다. 그래서 추리가 쉬웠다’고 말했다 한다. 옥중 추리로 연쇄 절도 집단을 일망타진한 비도크는 며칠 후 백작 부인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 남편을 기다리던 백작 부인이 총에 맞아 처참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인데, 그는 사상 최초로 과학적인 수사 기법을 동원한다. 그리고, 권총 상자의 파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