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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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샛 공부합시다
기회의 땅 중동과 이를 활용해야 하는 한국
1970년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전환하던 한국 경제에 큰 시련이 닥쳤습니다. 바로 두 차례의 ‘오일쇼크’였습니다. 수입한 석유 및 원자재를 가공해 제품을 수출하던 한국에는 각종 비용 상승의 요인이 되었죠. 이에 따라 달러의 국내 유입보다 유출이 많아지면서 위기감이 엄습해왔습니다. 한국은 이를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중동에 진출해 달러를 얻다1970년대 오일쇼크로 기름값이 폭등하자 중동 산유국들은 엄청난 수입을 올렸습니다. 원유 결제를 미국 달러화로 했기 때문에 막대한 오일달러가 중동으로 유입되었죠. 이런 상황에서 위기 극복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한국의 건설사였습니다. 중동 국가의 항만, 수로, 고속도로 같은 대규모 인프라 건설이 기회가 됐습니다. 주요 선진국보다 한국 건설사가 가격 경쟁력에서 유리했고, 건설 기간을 단축하는 등 중동 국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죠.대표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만 공사는 9억3000만달러에 수주했는데, 당시 한국 정부 예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습니다. 국내 건설사들이 중동에서 수주 성과를 올린 것은 달러가 부족했던 한국의 위기 극복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중동 건설 수주액이 1975년 7억5000만달러에서 1980년 82억달러로 급증하면서 안정적인 달러 공급원이 되었습니다. 또 국내 기업들 덕분에 한국은 중동과 외교관계를 맺게 되지요. 1977년 자매결연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 강남에는 ‘테헤란로’,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는 ‘서울로’가 생겼습니다. 당시 한국-중동의 외교적 친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네옴시티지난 11월 사우디아라비아의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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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자원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역청은 요즘 말로 아스팔트나 타르를 가리키지만, 고대에는 석유를 통칭하던 말이다. 고대인들은 역청을 죽은 고래의 피나 유황이 농축된 이슬로 보았다. 시커멓고 먹을 수도 없는 데다 냄새가 심해 기피 대상이었다. 고대 전쟁에서 역청은 화공을 펼치는 전략 무기이기도 했다. 특히 동로마제국의 ‘그리스의 불’은 역청으로 만든 최종 병기로 유명했다. ‘그리스의 불’ 제조법은 제국의 일급기밀이어서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BC 850년께 아시리아에서 유황, 기름, 역청을 혼합한 나프타에 불을 붙여 화공을 펼쳤다는 기록이 있다.석유가 널리 알려진 것은 근대에 등불 연료로 쓰이면서다. 그러나 석유를 그대로 태우면 매캐한 연기와 냄새가 났고, 별로 밝지도 않았다. 석유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증류하면 연료용으로 적합하다는 생각은 17세기에도 있었지만 현실화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858년 에드윈 드레이크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조명용 연료를 구하기 위해 땅을 굴착하다 석유를 발견했다. 드레이크는 최초의 유정 굴착자로 이름을 남겼다. 지표면에 고여 있는 역청을 이용하던 수준에서 땅속 채굴을 통해 대량 공급이 가능해진 것이다. 20세기 자동차 시대를 연 오일러시드레이크의 채굴 목적은 등불용 연료를 찾는 것이었다. 석유를 정제해 나온 등유는 등불용으로 적합해 19세기 후반 세계에 널리 보급되었다. 캘리포니아, 텍사스 등 유전이 발견되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가는 ‘오일러시’가 일어났다. 이후에 석유를 골드러시 시대의 황금에 빗대 ‘검은 황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초기 석유산업은 등유를 추출하고 남은 검고 끈적끈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