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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몽골에 승복한 고려는 강화서 개경으로 환도, 반대파는 삼별초로 집결···3년여간 항몽 전쟁

    고려는 강화라는 섬으로 피신해 당시 세계 최강 국가인 몽골에 38년간 저항했다. 섬이라는 전술적인 이점도 작용했지만, 세계 전략과 국제전이란 군사 작전의 특성을 이해한 무신정권의 판단력이 성공한 결과다. 하지만 국제질서는 변했고, 정복전쟁을 완료한 몽골 제국은 남송이라는 최후의 강적을 향해 동쪽에 군사력을 집중했다. 몽골의 협박과 회유는 100년간 권력을 무신들에 뺏긴 채 반전의 기회를 노리던 왕족과 귀족들을 돌아서게 했다. 또한 오랜 전쟁의 피해로 염전 분위기가 팽배했고, 강도정부에 대한 불신과 정부의 필요성이 혼재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사병 집단으로 시작한 삼별초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사병 집단으로 출발했다. 규모가 커지고, 군사력이 강해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분리됐다. 이후 강도정부에서 몽골에 포로가 됐다가 돌아온 사람들로 구성된 신의군(神義軍)이 합세해 삼별초라는 이름으로 재편됐다. 이들은 무신정권과 이해관계가 깊었고, 실제로 권력의 향방에 큰 역할을 한 군사 집단이다. 몽골에 강경했던 항전파인 그들은 배중손과 노영희 등을 주축으로 승화후인 온(溫)을 임금으로 추대한 후에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전면전에 돌입했다. 전력은 열세였지만 수군 능력이 뛰어나고 해양의 메커니즘을 잘 파악한 그들은 승부수를 던졌다. 해상의 섬들을 거점으로 해군력을 이용해 연안 지역을 관리하면서, 해전을 벌이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삼별초군이 불확실한 미래에 운명을 걸고 비장한 결심을 한 채 강도정부를 떠나는 광경을 《고려사절요》는 이렇게 기록했다. “배를 모아 공사(公私)의 재물과 자녀들을 모두 태우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약탈하고 쓸모있는 사람을 강제이주시켰던 몽골, 역참 설치해 교류…'진정한 세계화의 첫발' 평가

    칭기즈칸이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서아시아의 패자였던 호레즘과의 일전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218년 몽골이 보낸 상단이 오트라르에서 살해되면서 불거진 호레즘과 몽골의 대결은 칭기즈칸 군대의 ‘잔인함’과 군사적 ‘천재성’이 드러난 계기이기도 했다. 특히 호레즘의 심장이었던 부하라 공략은 칭기즈칸의 번뜩이는 기지가 빛난 순간이었다. 칭기즈칸은 사마르칸트를 경유하는 통상의 루트 대신에 현지인 투항자들을 길잡이로 활용해 키질쿰(붉은 모래) 사막을 횡단하는 강수를 뒀다. 1220년 전방전선 650㎞ 뒤에 있던 부하라 성문 앞에 몽골의 대군이 나타나자 부하라시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저항하면 학살 … 전문가는 몽골로 보내몽골군이 출현하자 방위병들은 400명의 투르크 병사만 성채 안에 남겨둔 채 줄행랑을 쳤다. 부하라 시민들은 다음날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의 지도하에 항복했다. 일부 병사는 부하라시 요새를 점거한 채 12일간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몽골군의 공격에 결국 제압됐다. 이후 몽골군이 부하라에 대해 처한 행동은 이후 트랜스옥사니아 지역에서 칭기즈칸 군대에겐 일종의 행동규범이 됐다. 특히 인력, 고상한 표현으로 인적 자원 처리에 있어서 그러했다. 우선 장인들(특히 무기 제조장인과 방적공)처럼 쓸모 있는 사람들은 엄선돼 동쪽의 몽골지역으로 보내졌다. 젊은이들은 몽골군의 다음 전투에서 활용될 ‘화살받이(arrow fodder)’로 잡혀갔다. ‘화살 폭풍(arrow storm)’이라고 불리는 집단 사격으로 적군의 혼을 빼놨던 몽골군은 적군의 공격에 대한 ‘싸고도 유용한’ 그러면서 ‘살아 있는’ 방어수단도 확실하게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200년간 이어진 발해의 나라 되찾기 활동, 후발해국·정안국·을야국·대원국 등 세웠지만…

    10세기 들어와 동북아시아는 국가 간 질서재편으로 소용돌이쳤다. 당나라가 907년에 붕괴되면서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는 대분열 시대가 시작됐고, 910년대에는 9개국이 난립한 상태였다. 토번(티베트)은 서남 지역의 영토를 대거 잠식했고, 몽골 초원에서는 세계사를 바꿀 ‘몽올’ 부족이 성장했으며, 840년에 멸망한 위구르 한(칸)국의 망명인들 또한 혼란을 일으켰다. 남쪽에서는 신라가 1000년의 역사를 마감하는 중이었고, 신흥세력인 후백제와 고려가 긴박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국제질서의 변화를 간파한 야율아보기는 동몽골의 초원지대와 요서에서 거란족을 통일(916년)하고, 서남쪽으로 토욕혼 등을 공격한 후에 몽골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거란은 925년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상경성, 헤이룽장성 닝안현)을 포위한 끝에 큰 전투 없이 4일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주변국 상대로 적극적 외교관계 모색그렇다면 위기에 직면한 발해는 어떤 자구책을 강구했을까? 신흥국인 후량과 후당에 몇 번이나 왕자를 파견했다. 신라 등(‘新羅諸國’)에 구원을 요청하는(《거란국지》) 등 타국과 우호관계를 모색했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왕건의 선조인 호경(虎景)은 백두산에서 내려온 사냥꾼으로서, 성골(聖骨) 장군으로 불렸는데, 이는 발해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왕건은 발해 유민을 환대했는데, 거란을 견제하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방문한 호승(胡僧)을 통해 후진(後晉)의 고조에게 “발해는 우리와 혼인했습니다(渤海我婚姻也)”라고 했다.(《자치통감》) 백두산 화산 폭발은 발해 멸망 후그런데 의문이 든다. 야율아보기는 발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백제 유민, 대한해협 건너 일본국 탄생에 큰 역할…일본 일왕가와 혈연관계 깊어지고 문화발전에 기여

    고당(高唐)전쟁에서 평양성이 함락당하면서 보장왕과 연남산 등의 귀족들과 장군들, 관리들, 기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군인과 백성 등 3만 명이 묶인 채로 중국의 시안(長安)까지 끌려갔다. 유민들은 요서지방, 산둥반도, 강회 이남(장쑤성·저장성), 산남(내몽골 오르도스), 경서(산시성·간쑤성), 량주(칭하이성과 쓰촨성이 만나는 주변 지역) 등의 불모지에 분산됐다. 신라로 망명해 대당(對唐)전쟁에 합류했던 부류는 신라인이 됐고, 북만주나 동만주 일대 오지로 탈출한 유민들은 거란·선비·말갈 등 방계종족들에 동화되고 말았다. 또 한 무리는 이미 진출해 교류했던 일본열도로 건너갔다.한편, 나라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한 고구려인들도 있었다. 이정기 일가는 청주, 서주 등 산둥반도와 장쑤성(江蘇省) 일대에 제나라를 세운 후 당나라와 전투를 벌이며 54년 동안 발전했다. 또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에서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성장했다. ‘보트피플’ 백제 유민 일본으로 건너가그럼 백제 유민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 660년 8월, 실정과 오만으로 저항 한 번 못한 채 항복한 의자왕과 대신들 그리고 죄없는 병사들 1만2800명은 배에 실려 당(唐)으로 끌려갔다. 의자왕과 왕자들, 일부 대신은 당나라의 벼슬을 받았으나, 복국군의 임금으로 고구려로 망명했던 부여풍은 붙잡혀 영남(廣東·廣西지방)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산둥지역에 버려졌던 백성들은 다시 요동으로 이주당했다. 한편 주류성 전투와 백강(백촌강)해전에서 대패한 복국군은 “어찌할 수 없도다. 백제의 이름은 이제 끊어졌고, (조상)묘소에도 갈 수가 없구나…”(《일본서기》)라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몽골·티베트 등 아시아 각지로 흩어진 고구려 유민…불모지 개척, 접경세력과 전투에 이용당했다

    나라가 멸망한다는 것은 군대가 전투에서 패하고, 정부가 괴멸하고, 지배계급이 파멸하는 것을 일컫는 게 아니다. 단순히 삶이 비참해지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파멸하고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자는 선조들처럼 명예를 간직한 채 역사에 남았고, 자의든 타의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 ‘유민(流民)’이라는 신분으로 살육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했다. 또 자발적으로 망명하거나 탈출을 시도했고, 일부는 부활에 성공했다. 한민족의 슬픈 ‘디아스포라(diaspora·고국을 떠나는 사람·집단의 이동)’다. 요동지역 고구려인 2만명 이하로 줄어645년, 고당(高唐)전쟁에서 고구려는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요동성(遼東城) 전투에서 패배해 군인과 백성 등 7만여 명이 요주(요서·요동) 등으로 끌려갔고, 다시 1만4000명이 유주(幽州·베이징 일대)로 끌려가 정착했다.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당하면서 보장왕과 연남산 등의 귀족들과 함께 고사계 같은 장군들, 관리들, 기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군인과 백성 등 3만 명이 묶인 채로 중국의 시안(長安)까지 끌려갔다.669년 5월엔 20만 명(《자치통감》엔 3만8200호, 《구당서》엔 2만8200호)이 끌려가 요서지방, 산둥반도, 강회 이남(장쑤성·저장성), 산남(내몽골 오르도스), 경서(산시성·간쑤성), 량주(칭하이성과 쓰촨성이 만나는 주변 지역) 등의 불모지에 분산됐다. 또 679년에는 요동지역의 유민들을 하남(내몽골 오르도스)과 농우(간쑤성과 칭하이성 일대)로 이주시켰다. 이후에도 여러 번 끌려가서 나중에는 요동지역에 남은 사람이 2만 명이 못될 정도로 줄었다(지배선, 《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남·북 중국, 유연, 고구려 등 세력균형 이룬 동아시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 일본 영국 미국 프랑스 청나라가 벌인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은 조선의 개항과 멸망, 식민지화를 초래했다. 20세기 중반 미국과 소련이 치른 그레이트 게임은 한민족의 분단과 비극적인 6·25전쟁을 몰고왔다. 최근엔 미국과 중국 간에 ‘새 그레이트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서기 598년, 고구려 영양왕은 말갈병(또는 거란병) 1만을 거느리고 요서지방을 공격했다. 《수서(隋書)》의 또 다른 기사는 이 공격에서 고구려가 해양방어시설을 빼앗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수나라 문제(文帝)는 곧 30만의 수륙군으로 반격했으나 육군은 역병이 창궐해 요하전선을 넘지 못했다. 한편 래호아가 지휘하는 6000명의 산동수군은 평양성을 향해 출항했지만 폭풍우를 만나 배들이 표몰됐고, 죽은 자가 십중팔구였다고 한다(《수서》). 하지만 기상조건들을 분석하면 장산군도 등에 구축한 해양방어체제에 막히고 고구려 수군의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70년 전쟁의 신호탄 ‘고·수전쟁’이렇게 ‘고·수(高·隋)전쟁’의 신호탄이 올랐고, ‘고·당(高·唐)전쟁’을 거쳐 신라가 참여한 이른바 ‘삼국통일전쟁’까지 지속됐다. 전쟁의 목적과 진행과정, 결과 등을 보면 몇 단계로 구성된 ‘70년 전쟁’이었다. 한륙도(한반도와 만주 포함)·중국·일본열도·몽골·알타이·중앙아시아가 포함된 유라시아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는 그레이트 게임이었다.유라시아 동쪽은 1세기 이상 분단된 남·북 중국, 몽골 초원의 유연, 동쪽의 패자인 고구려 등 4핵과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탐라, 대륙과 해양 연결하는 물류망 거점 역할

    우리 역사에서 신비롭고 역동적이며 국제적인 나라가 있었다. 독특한 가치를 지녔던 해양 소국 탐라(耽羅)다. 고려 후기 삼별초 세력이 최후의 항전을 펼쳤으며, 뒤따라 들어온 몽골인들이 말을 사육하면서 속지로 삼았다. 바다를 소외시킨 조선에서는 유배지로 사용되면서 기피의 땅이 됐다. 현대에 들어와 발생한 비극들은 아직 치유가 덜 됐다.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지 않더라도 해륙적인 관점에서 제주도는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동아지중해 해륙교통망의 인터체인지에 있다. 몽골과 북만주, 랴오둥반도, 산둥반도에서 육지와 해안, 짧은 서해를 이용해 한반도에 닿은 후, 추자군도를 중간에 두고 100㎞ 정도 건너면 상륙할 수 있다. 중국의 저장성, 푸젠성에서 해류와 서풍계열의 바람을 이용하고, 또 동남아시아에서는 흑조(구로시오)에 올라타고, 봄철에 부는 남서계절풍을 이용해 오키나와를 거쳐 동북상하면 제주도에 닿는다. 물론 고려나 조선시대의 표류 기록들에 나타나듯 반대의 현상도 있었다. 中·日·삼한과 활발하게 무역제주도에서 대마도(쓰시마섬)까지는 대략 255㎞로 멀지만, 항해 조건은 좋은 편이다. 북부의 사고 마을에 보존된 ‘오카리부네’는 제주도의 ‘테우’와 같은 종류의 뗏목이다(정공흔 설). 규슈 서쪽의 고토열도는 근대에도 뗏목을 타고 오갔을 정도로 밀접했다. 2003년 대포항을 출항한 뗏목 장보고호는 폭풍 속에서 표류했는데도 13일 만에 나루시마에 안착했다. 해발 1995m인 한라산은 시인거리가 약 160여㎞이므로, 원양 항해하는 선박들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 동서 73㎞, 남북 41㎞에 면적이 1845㎢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거주하면서 교류하기에 좋

  • 역사 기타

    고려는 오랜 항쟁 끝에 몽골에 항복한 이후 큰 변화…13세기말 ‘대몽골 울루스’에 편입돼 세계와 교역

    1231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침입과 고려왕조 28년에 걸친 항쟁은 고려의 사회와 경제에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안겼다. <고려사>는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1254년의 일이다. “이해에 몽골병에 사로잡힌 남녀가 무려 20만6800여 명이요, 살육된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지나가는 주군(州郡)마다 모두 잿더미가 됐으니, 전란이 있은 이래로 이때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몽골 침입과 세계 편입 결국 1259년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는데, 이후에도 전란은 끊이지 않았다. 1270년 고려 중앙군의 핵심 전력인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새로운 왕을 옹립하고 근거지를 진도와 제주도로 옮기면서 고려와 몽골 연합군에 끈질기게 저항했다. 1273년 삼별초의 난이 진압되자 원(元) 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몽골은 일본 정벌에 나섰다.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일본 정벌에서 군수를 조달하고 병사로 동원된 고려 인민의 고통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다. 피해가 컸던 만큼 전란 이후 재건된 고려의 사회와 경제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13세기 말 전란의 피해는 거의 복구됐다. 1296년 개경에 1008개 기둥으로 연결된 긴 복도의 시전(市廛)이 다시 세워졌다. 그보다 앞서 1279년에는 원과의 역참로가 개통됐다. 이로써 고려왕조는 한반도에서 발칸반도까지, 베트남에서 헝가리까지, 시베리아에서 인도까지의 광활한 유라시아대륙과 지중해에서 인도양을 거쳐 동중국해와 발해만에 이르는 광대한 해원(海原)을 종횡으로 엮는 대(大)몽골 울루스에 깊숙이 포섭됐다. 울루스는 국가 또는 백성이란 뜻이다. 이전의 세계는 7개의 비교적 자급적인 지역으로 구성됐으며, 이슬람이 각 지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