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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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경성 백화점들 활황…외제 사는 조선인 수두룩
1920년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대중 잡지인 ‘별건곤’은 1929년 1월호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경성우편국을 끼고 돌아서면 요지경 같은 진고개다. 하라다 상점에 들어서니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그래도 놀라지 말라. 반수 이상이 조선남녀다. ( … ) 미스코시에 들어가니 아래층은 음식과 과자를 팔고, 이 층으로 가니 거기는 일본 옷감뿐이더라. 삼 층에 가니까 장난감, 학용품, 아동복, 치마감이 있다. 길거리에 나서니 진고개 2정목, 3정목 입을 벌리고 정신 다 빠져서 헤엄치듯 걸어나는 조선 부인들….”1920~1930년대 당시 경성의 번화가인 혼마치(서울 명동 근처)에선 거리를 구경 다니는 혼부라(혼마치와 어슬렁거리다의 합성어)가 득시글거렸다. 백화점 구경을 즐기는 주 고객인 여성과 학생에 대한 당대 언론인들의 시각은 그리 따뜻하지 않았다.‘별건곤’은 “조지야 하라다 상점 같은 큰 상점에는 언제나 조선 여학생, 신식 부인들로 꼭꼭 차서 불경기의 바람이 어디서 부느냐 하는 듯한 성황”이라며 “그곳들이 특별히 값이 싸서 그런 게 아니라면 무엇에 끌려서 그러는지 알 수 없다”고 한탄했다. “미스코시, 오복점(기모노점)이 또 낙성되었으니 제일 기뻐할 이는 조선 여학생일 것 같다”며 “어쨌든지 훌륭한 상점에서 물건을 사야만 자기 코가 높아지는 듯한 선입견을 가진 것이 신식 여자인가보다”라는 비꼼과 함께.당시 ‘모던 걸’(물론 ‘모던 보이’도)은 사회에서 매우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1920년대 이후 조선인들이 혼마치 상가의 구매자로 등장하면서 이들에 대한 당대인의 묘사와 평가도 늘어난다.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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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시전행랑·백화점에서 옴니채널까지…유통산업 끝없는 진화
우리는 고려시대까지도 화폐가 제대로 쓰이지 않을 정도로 유통산업의 발전이 더뎠다. 조선시대에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해서 상업을 낮게 평가했다. 국내 유통산업이 2019년 기준 134조1132억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7.9%를 차지하며 전체 취업자의 14%를 고용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짧은 기간 선진 제도의 도입과 혁신을 거듭한 덕분이다. 상설시장에서 복합쇼핑몰까지우리나라에 상설시장이 생긴 것은 조선 개국 때로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숭례문(남대문) 주변에 ‘시전행랑(市廛行廊)’을 설치하면서부터다. ‘팔지 않는 물건이 없다’는 남대문시장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육의전으로 대표되는 시전상인에게만 물건을 팔 수 있는 권리(금난전권)를 부여하는 등 유통을 억제하는 정책을 썼다. 18세기 후반 정조 때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면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허용되고 1897년 남대문시장이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으로 거듭났지만, 여전히 5일장과 보부상이 전국의 유통을 담당했다.쌀장사와 종이 수입으로 큰돈을 번 박흥식이 1931년 서울 공평동에 세운 화신백화점은 한국 첫 백화점으로 일제시대 일본 상인들이 장악한 국내 유통산업에서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켰다. 박흥식은 화신연쇄점을 모집해 전국에 350개의 가맹점을 두는 등 프랜차이즈 사업을 도입한 인물로도 평가된다. 연쇄점은 같은 종류의 상품을 파는 점포를 여러 지역에 개설해 유통비용을 낮춘 사업모델이다.슈퍼마켓은 1970년대 초 서울 한남동에 개점한 한남슈퍼가 첫 출발이다. 옷 식품 잡화 등 한 품목만 취급하는 동네 가게와 달리 다양한 상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