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태풍에 대패로 끝난 쿠빌라이칸의 일본 정벌…동원된 고려에선 친원파 득세하며 몽골풍 만연

    당시 세계 최고의 군사력과 기술력, 경제력을 갖춘 원나라와 고려의 대규모 연합군은 변방의 섬나라 일본 원정에서 두 번씩이나 실패하고 퇴각했다. 그런데 우리는 패인을 ‘바람(神風)’ 탓으로 몰고, 아쉬워하는 평가까지 한다. 그것이 사실일까. 전쟁의 성격을 분명하게 아는 확실한 방법은 실질적인 주체인 원나라의 정책을 살피는 것이다.첫째는 세계 제국 완성이라는 원나라의 정책과 쿠빌라이칸의 개인적인 야망이다. 칭기즈칸의 뜻을 실천한 2대 오고타이칸은 실제로 유럽 정복의 문턱까지 도달했다. 후계자 경쟁에서 승리한 4대 칸인 쿠빌라이에게 이 과업은 일종의 숙명이었다. 그는 1270년에 몽골의 원향인 동방에서 고려의 항복을 받아냈고, 1273년에는 삼별초를 진압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어 남송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 44년 만인 1279년에 멸망시켰다. 무인들이 지배하는 바다 건너 소국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가치가 작았다. 또 은, 면, 수은 등의 물품들이 있다 해도 경제적인 가치는 낮았다. 그런데도 쿠빌라이칸은 왜 대규모의 연합군을 편성해 어려운 해양전을 감수하면서 일본 열도를 공격했을까.둘째는 고려를 장악하는 원나라 정책의 문제다. 원나라가 추진한 고려 정책은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전략적인 가치가 약하고, 우선 과제가 아닌 고려와의 전면전을 연기하면서 강도정부를 존속시킨 일이다. 2단계는 삼별초를 진압하고, 여몽연합군을 조직해 일본을 공격한 일이다. 고려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원치 않은 전쟁에 동원됐지만 패배로 말미암아 많은 병력이 희생됐고, 수많은 배를 건조하기 위해 국토는 황폐해졌을 것이다. 전비를 충당하느라 국가 경제력도 소진됐다.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몽골 쿠빌라이의 일본 정벌에 합류한 고려…900여척 전함에 1만여명 태우고 마산서 출항

    4대 황제에 오른 쿠빌라이에게 몽골제국이 부여한 최대 과제는 남송의 멸망과 동방의 완전한 정복이었다. 일본열도는 지정학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치가 별로 없었다. 일부의 견해대로 남송을 공격할 때 외교적인 배후 역할 정도였다. 쿠빌라이칸은 1226년 고려에 일본 정벌 의도를 선언하고 협조를 요구했다. 이에 고려는 1268년 6월 쿠빌라이와 고려의 국서를 일본에 전달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일본은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고, 사신을 억류했다.드디어 원정이 결정되고, 고려는 정월 16일에 공사를 시작해 5월 그믐까지 대선과 소선(小船)을 합쳐 900척을 건조했고, 물품도 모두 갖췄다. 변산반도 지역과 나주 천관산 지역의 목재를 활용해 전선 300척, 빠른 공격선 300척, 급수선 300척 등 900척을 불과 4개월 반 만에 완성한 것이다. 고려의 조선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고, 계속된 전쟁에도 국력과 노동력 등이 남아 있음을 알려준다.음력 10월 3일. 원나라의 홀돈(忽敦·쿠둔)과 홍다구가 지휘하는 몽골·한군(蒙·漢軍) 2만5000명과 군사 8000명, 사공(梢工)·수로안내자(引海)·선원(水手) 6700명을 포함한 1만4700명의 고려군이 승선한 전함 900여 척이 마산 합포에서 출항했다. 대한해협을 건너 음력 10월 5일 대마도 남쪽에 상륙해서 고모다 해안(小茂田浜) 전투에서 손쉽게 승리했다. 연합군은 이어 음력 10월 14일 늦은 오후 50여㎞ 떨어진 이끼섬에 상륙하고, 15일에 점령했다.해안에서 평지로 20여㎞ 진군하면 일본의 서경이며 군사사령부인 다자이후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런데 의외로 승리를 목전에 둔 연합군은 돌연 퇴각해서 만 안에 정박시킨 선박으로 귀환했다. 이후 새벽녘에 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