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 상식에 도전한다- ④ <끝> 산업화와 박정희 정권에 대한평가

“역사에선 비용이 지불되지 않은 성취란 없다”
[기획] 이영훈 교수와 역사 대담 (4)
지난 14일 여의도 자유기업원에서 열린 이영훈 교수와의 역사대담 마지막 주제는 '산업화와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였다.

이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에 대한 신념과 개발에 대한 집념,수출 일선에서 혁신을 수행한 기업가들,고된 노동을 수행하고 숙련과 기술을 익혔던 노동자들의 공헌을 경제개발을 이끈 원동력으로 뽑았다.

역사대담을 마치며 이 교수는 "비용이 지불되지 않은 성취란 없다"며,공과 과를 함께 평가하는 역사에 대한 공정한 자세를 당부했다.



▼김승재=4 · 19민주혁명이 있은 지 1년이 좀 지나 5 · 16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장면정부에게 좀 더 시간이 있었으면 혼란을 극복하고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요?

"나도 그런 가정을 완전히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5 · 16쿠데타 또는 군사혁명은 1950년대 한국 정치 · 사회의 모순구조 속에서 어느 정도 예비돼 있기도 했습니다.

6 · 25전쟁을 거치면서 군부는 한국에서 다른 사회집단에 비해 가장 유능하고 잘 조직된 집단으로 성장했습니다.

1950년대의 혼란 속에서 4 · 19 이전부터 '조국 근대화'의 강렬한 포부를 지닌 젊은 장교들은 쿠데타의 기회를 모색했습니다.

4 · 19 이후 군부에서는 영관급 장교들이 3 · 15부정선거에 책임이 있는 부패하고 무능한 지도부의 퇴진을 요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요구가 거부되자 그들은 군부에서 청렴한 이미지로 명망을 얻고 있던 박정희 육군 소장을 중심으로 결집했죠.

그들의 쿠데타 계획은 4 · 19 이후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심화하자 더욱 탄력을 받았습니다.

5 · 16쿠데타는 근대화의 지체에 따른 위기,군부의 팽창에 따른 사회 조직의 불균형,4 · 19 이후의 심한 혼란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



▼이승수=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군부가 쿠데타를 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극도로 피폐한 민생고의 해결이었습니다.

군사정권은 집권하자마자 개발계획을 세우고 집행하는 주체로서 경제기획원을 설립한 다음 1962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합니다. 1964년께부터는 수출주도 공업화로 개발전략을 크게 수정합니다.

이후 1965년부터 매달 수출진흥확대회의와 월간경제동향 보고라는 두 회의를 소집하여 관계,업계,학계의 전문가들이 정책을 모색하고 조정하는 시스템을 구축합니다.

1965년부터 박 대통령이 서거하는 1979년까지 거의 매달 빠짐없이 회의가 열렸는데,다른 후진국에서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또한 한국경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국제시장의 유리한 환경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64년부터 GATT 제7차 케네디라운드가 성립하여 주요 국가의 관세율을 절반으로 낮춤으로써 세계의 자유무역이 크게 활성화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후진국이 선진국에 노동집약적 공산품을 수출할 시장이 열렸습니다.

바로 그때 박정희 정부는 기존의 자립적인 수입대체 공업화에서 개방적인 수출주도 공업화로 기민하게 개발노선을 전환하였습니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도 추진하였습니다.

그 결과 일본의 자본 · 기술 · 부품과 한국의 노동력,미국의 시장을 연결시키는 거대한 국제적 시장연관이 창출된 것이죠."



▼황인혜=정부의 시장개입은 특혜와 부정부패 등을 낳지 않나요?

"정부가 경제에 개입을 하게 되면 반드시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관료들이 수집하는 정보의 불완전성과 자금을 분배할 권한을 지닌 관료들의 도덕적 해이 때문이죠.

박정희 시대 때도 그런 문제가 발생해서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크게 봐서 한국 정부의 경제 개입은 실패를 최소화하였다고 얘기할 수 있는데,그것은 성과와 실적이라는 객관적인 기준에 입각하여 자금을 배분하였기 때문입니다.

수출금융이 전형적으로 그랬는데요,수출업자가 외국에서 신용장만 받아 오면 아주 유리한 조건의 금융이 제공되었던 것입니다.

즉 수출이란 객관적인 성과를 기준으로 해서 자금이 분배되었기 때문에 정부 개입에 따른 실패를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기준을 엄격히 유지한 것은 박정희 정부의 도덕 능력이랄까,개발에 대한 집념,그것들을 지탱한 정신적 긴장이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김승재=당시 경제성장의 성과는 자본가 계층이 다 차지하고,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지 않았나요?

"경제성장의 초기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장시간의 저임금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산업화 초기의 그 같은 노동환경은 세계경제사에서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은 오히려 그러한 문제를 단기간에 극복하였던 셈인데,그것은 수출시장을 무대로 고도성장의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1960~80년대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노동생산성의 상승 속도에 따라서 꾸준히 올라갔습니다.

또 다른 실증 연구에 의하면 도시 근로자들의 임금소득의 분배구조는 세계적으로 양호한 수준이었습니다.

경제가 급속히 팽창하던 시기여서 취업의 기회가 그만큼 많았던 것이죠.도시근로자들의 소득분배가 불공평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고도성장이 끝난 1997년 이후라고 하겠습니다. "



▼김초롱=당시의 고도성장을 박정희 개인의 공으로만 돌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시대에 있었던 모든 역사적 성취를 박정희 개인의 공으로 돌리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더 큰 공을 남긴 사람은 혁신을 수행한 기업가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또 산업의 현장에서 고된 노동을 수행하고 숙련과 기술을 익혔던 노동자들의 공헌도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박정희는 지휘봉을 잡은 사람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한 것이죠.그렇다고 누구나 다 할 수 있었던 역할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박정희의 개발정책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1967년과 1971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은 대기업 주식의 대중화,중소기업과 농업의 발전을 우선하는 대중경제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 국민들의 판단도 쉽지 않았어요. 정치적 선택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그런 방향으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 많은 후진국이 그러한 노선을 걷기도 했습니다만,대부분의 경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역시 정답은 넓은 세계시장을 상대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는 대기업을 육성하는 것이었는데,그게 당시로서는 과연 정답인지 아니면 나라를 팔아먹는 짓인지 확실치 않았던 것이죠.

그런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14년간 그 길만 죽 밀고 나갔는데,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



▼김형주=대담을 정리하는 의미에서,역사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늘날의 한국이 있기까지 역사적 성취를 이루는 과정에서 어두웠던 역사나 희생도 적지 않았습니다. 5 · 16쿠데타,10월유신,5 · 18민주항쟁 등이 그러한 예입니다.

그것들을 오늘날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 우리 한국인들이 지불한 비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용이 지불되지 않은 성취란 역사에서 있을 수 없지요.

이에 특정 시대가 이룩한 역사의 공적과 그 시대가 범한 역사의 과오는 동전의 앞뒤와 같은 관계로서 함께 평가되어야 마땅하다고 하겠습니다.

곧 비판은 비판대로 하면서 공은 공대로 평가하는 것이 역사에 대한 공정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각에서 1948년 이후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바라보면 적은 비용에 많은 성취를 이룬 역사임을 알게 됩니다.

크게 보아 위대한 성취의 역사였던 것이죠.

우리 국민이 모두 그러한 밝고 긍정적인 역사의식으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

정리=이유미 바이트 기자 worldeyu@naver.com

※대담 동영상은 자유기업원 프리넷뉴스(http;//www.fntv.kr/)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