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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영국 '남해회사' 투기열풍에 거품법 제정…주식회사 제도 100년 이상 인정하지 않아

    17세기 후반 스페인과의 전쟁 등으로 국채가 급속히 늘면서 영국 정부는 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 1711년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를 설립했다. 회사가 국채를 매입하도록 하고, 정부가 남아메리카 지역의 무역독점권을 회사에 부여한 것이다. 1720년 영국은 투기 광풍에 휩싸였고 남해회사 주가는 10배 이상 올랐다. 남해회사 뒤를 이어 수많은 주식회사가 난립하는 등 투기 열풍이 전국에 확산됐다.위험을 인식한 영국 정부는 1720년 ‘거품법(Bubble Act)’을 제정해 민간회사가 주식회사 형태로 설립되는 것을 금지했다. 거품법은 투기를 선동한 자의 재산을 몰수하고, 새로운 회사를 설립할 때 의회의 허가를 받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미 거품이 가득 낀 남해회사의 주가가 폭락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수많은 투자자가 파산했고 영국의 주식시장은 혼란에 휩싸였다. 남해회사 파산을 계기로 기업 경영의 투명성 확보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거세졌다. 주식회사 제도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경계심도 커졌다.결국 영국 경제는 이후 100년 이상 주식회사를 현실적 제도로 인정하지 않았다. 남해회사 파산 충격으로 영국 경제의 성장과 산업혁명은 적어도 거품법이 폐지되는 1825년까지는 주식회사라는 근대적 기업제도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홀로 진행돼야 했다. 이에 대해 론도 캐머런 교수는 일시적 장애물에 불과했다고 보지만 영국의 역사학자 존 카스웰은 거품법이 영국에서 상업혁명의 출현을 40~50년가량 지체시켰다고까지 평가하기도 한다.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름만 ‘남해 버블’이 아니라 ‘미시시피 버블’로 달랐을 뿐이다.네덜란드 암

  • 역사 기타

    양념이 어떻게 금보다 비쌀 수 있을까

    인류가 향신료를 이용한 것은 BC 3000년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수메르의 기록에 향신료와 허브에 관한 내용이 있다. 고대 이집트는 미라의 방부 처리에 여러 가지 향신료를 사용했다. BC 1224년 사망한 파라오 람세스 2세 미라의 코에서 후추 열매가 여러 개 발견되었다. 영생과 부활을 기원한 것이다. 후추는 인도가 원산지라는 점에서 당시에도 인도와 이집트 간에 교역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향신료는 적은 양으로도 고기의 풍미를 확 바꿔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부패를 막는 효과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향신료를 약재로 이용했다. ‘향신료의 왕’으로 불린 후추는 화폐로도 통용되어 세금 납부나 뇌물 수수에 이용되었다. 현금처럼 다 되는 후추향신료는 매우 다양하다. 고추 생강 마늘 겨자 파 부추처럼 향이 나고 매운 식물은 모두 향신료로 분류된다. 식물의 잎, 꽃, 열매, 줄기 등 다양한 부위에서 얻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주목받은 열대식물인 후추 계피 정향 육두구를 이르러 ‘4대 향신료’라고 한다. 후추와 계피는 지금도 흔하지만 정향과 육두구는 우리에게 다소 낯설다. 정향은 향신료 중 유일하게 꽃봉오리에서 얻는데 꽃봉오리의 생김새가 한자 ‘丁(정)’자를 연상시켜 붙여진 이름이다. 치약이 없던 시절에 주로 구취 제거, 치통 완화, 감기약 등으로 쓰였다. 육두구는 20m까지 자라는 육두구나무 열매의 씨앗이다. 영어로 ‘nutmeg’는 ‘사향냄새가 나는 호두’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위장을 보호하고 설사를 멈추게 하는 효과가 있어 중국에서는 BC 2000년께부터 쓰였다.4대 향신료는 원산지와 주된 수요처 간 거리가 멀었기에

  • 역사 기타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했다

    세계를 호령한 로마도 시작은 미약했다. BC 8세기 티베르 강변의 작은 도시국가로 출발해 2세기 거대 제국을 이루기까지 1000년간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가장 취약했던 것이 바다였다. 카르타고와 일전을 벌인 1차 포에니전쟁 전까지 로마는 놀랍게도 대형 전함이 한 척도 없었다.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는 동안에는 바다로 나갈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 강에서 쓰는 소형 전함 20~30척이 전부였다. 그런 로마가 대형 전함이 절실해진 건 바다로 눈을 돌리면서부터다.로마의 첫 타깃은 당시 서지중해의 강자 카르타고가 장악한 시칠리아섬이었다. 로마는 대형 전함 100척 규모의 함대를 계획했지만 건조 기술도 해전의 노하우도 없었다. 그런데 운이 따랐는지 BC 260년 로마로 표류해온 카르타고의 5단 갤리선을 나포해 이 배를 본떠 두 달 만에 갤리선 100척을 만들었다. 로마의 탁월한 모방 능력 덕이었다.물론 배 모양은 형편없었고, 노 젓는 기술부터 배워야 했다. 해전 경험이 없던 로마 함대는 카르타고와의 첫 해전에서 비참하게 깨졌다. 심지어 사령관까지 포로로 잡혔다. 카르타고의 빠른 갤리선은 로마 갤리선에 바짝 붙어 지나갔다. 카르타고는 그렇게 로마 갤리선의 노를 부러뜨린 뒤 움직일 수 없게 만들고 옆구리를 들이받아 침몰시키는 전법을 썼다.초기에 로마는 카르타고에 밀렸다. 그러나 로마인은 창의성과 실용성이 남다른 민족이었다. 정상 해전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보고 코르부스를 개발했다. 코르부스는 끝에 날카로운 송곳이 달린 긴 나무판자로 일종의 잔교(다리 모양의 구조물)였다. 로마군은 카르타고 갤리선 갑판에 코르부스를 내려박아 자신들의 배와 고정시킨 뒤 정예병이 이를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