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경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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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친경 부활했지만 농업생산량은 급감 '아이러니'
광해군 이후에는 현종 대에 이를 때까지 친경의식이 치러지지 않았다. 친경이 다시 논의된 것은 숙종 대로 남인의 대표 허목이 옛 기록을 근거로 친경의례를 시행하자고 적극 건의한 이후였다. 하지만 친경의 ‘부활’은 쉽지 않았다. 마침 천연두가 유행한 탓에 반대 의견이 적지 않았다.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친경 당일 큰비가 내려 관경대에 설치된 일월오악도 병풍이 찢어지고 소를 끌고 쟁기를 밀 수 없을 정도로 땅이 질척대자 친경 행사가 연기된 것이다. 다음날 현종 왕릉인 숭릉의 능침이 무너지는 사고까지 생기면서 친경의례는 아예 무산됐다.이후 오랫동안 중단됐던 친경의식은 영조 때 되살아났다. 영조는 각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1753년(영조 29년)과 1764년(영조 40년), 1767년(영조 43년) 친경을 거행했다. 1767년 영조는 세손과 함께 친경하고 고사에 따라 친잠(누에치기)도 하기로 했다. 이때 곡식의 종자를 받아 보관하는 장종의식을 같이 치렀다. 정조 때는 대규모 행사로 친경은 하지 않았지만 1781년 윤5월에 적전에서 보리 베는 것을 보는 의식은 거행했다. 친경의식은 고종(1871)과 순종(1909, 1910) 때까지 명맥을 이었다.국왕의 친경의례가 제대로 부활한 시기는 쌀이 전국 장시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는 교역상품이 된 때였다. 인구가 증가하고 가난한 하층민까지 쌀을 주식으로 소비했던 것이다.윤용출 부산대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농업노동 같은 비숙련 노동자가 받는 쌀임금은 18세기 초 하루 8되 수준으로 상당히 높았다. 이는 1970년대 수준에 필적하는 것이지만 이후 쌀임금 수준은 1900년까지 200년간 하락하게 된다. 경상도와 전라도 다섯 지역에서 관찰된 논 1두락당 소작료도 174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