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의 몸값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고려 말 노비 몸값, 소·말보다 못해…조선시대 매매 제한하자 가치 뛰어
조선시대 노비는 말이나 소보다 못한 몸값이 매겨졌다. 노비의 몸값은 당대 법전들에 담긴 규정을 통해 가늠해볼 수 있다. 《경국대전》의 <호전·매매한>조에는 토지와 가사(家舍) 매매에서 거래를 물릴 수 있는 기한을 매매 후 15일로 정했다. 그리고 본문에 주를 달아선 ‘노비도 이와 같다’고 규정했다. 이와 함께 노비 거래 항목이 소와 말의 매매한(賣買限)과 같은 조목에 들어 있는 것을 근거로 노비의 처지가 마소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보았다. 이뿐만 아니라 고려 말 공양왕 3년(1391)의 상소문을 통해 살펴볼 때 ‘사람의 가격이 마소의 가격보다 훨씬 못했다’고 지적했다.그나마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노비의 몸값이 조금 올랐다. 노비를 토지에 결박하기 위해 노비 매매를 크게 제한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으로서 값어치를 평가받지 못한 수준이긴 하지만 말이다. 성종 7년(1476)에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각종 노비의 가치가 상세히 기록돼 있다. 여기선 15~16세기 초 장년 노비 한 사람의 가격이 저화 4000장이었다고 한다. ‘저화 20장=면포 1필’로 환산할 경우, 노비 가격은 면포 200필에 해당한다. 이는 조선 초 기록인 《태조실록》 7년 6월 기미조 기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노비의 몸값에 비해선 적잖이 오른 셈이었다. 1398년 노비의 값은 많이 잡아도 오승포 150필로 말 한 마리(400~500필)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고 한다.이후 조선 왕조가 안정되면서 노비의 값은 15~40세는 400필로, 14세 이하 40세 이상은 300필로 개정됐다고 하니 노비 몸값은 어느 정도 상승세를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말에 비해선 훨씬 낮았다. 성별로는 남자인 노(奴)가 여자인 비(婢)보다 쌌다. 양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