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한국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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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역사상 국제무역 가장 활발했던 고려…인삼·청자 찾아 마팔국·아라비아서 오기도
시대와 백성들이 선택한 고려는 출발부터 다양한 종류의 산업과 무역이 발달한 국제적인 사회였다.고려는 통일을 성취하기 전인 924년에도 7월에는 상선이, 10월에는 사신선이 황해를 건너가 산둥반도 북부의 등주(펑라이)에서 후당과 무역을 벌였다. 정국이 안정된 11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송나라는 운하도시인 동경(카이펑)을 수도로 삼고, 상업과 무역을 추진했다. 거란을 의식하고 고려의 편의를 위해 국가항구를 산둥반도의 남단인 판교진(지금 산둥의 고현)으로 옮기고, 무역 업무를 도와주는 ‘시박사’라는 관청까지 설치했다.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에 군사적으로 압박을 가하자 상업의 중심지를 남쪽으로 옮겼다. 1078년에는 명주(닝보우)에서 먼 바다로 나가는 주산군도로 들어가는 진해(칭하이)에 고려 사신과 상선들을 맞이하는 영빈관을 지었다. 1117년에는 닝보우에 고려사관을 설치했다.고려와 송나라는 보통 100명에서 300명이 승선한 선박을 이용해 상당한 규모의 공무역을 했다. 송나라는 고려에 의복, 상아, 물소뿔, 옥제품, 술, 새(鳥), 차, 칠제품, 악기 등을 수출했다. 반면에 고려는 비단, 금제품, 은제품, 나전 세공품, 꽃방석(화문석), 자개박이 그릇, 인삼, 소나무, 부채, 종이, 붓, 먹, 가죽 등 수천 점을 수출했다. 1078년에는 송나라가 무려 100종이 넘는 품목과 6000건에 달하는 물건을 보냈고, 고려도 역시 그에 버금가는 물건을 보냈다.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고려는 민간무역이 발달했다. 기록을 보면 송나라 상인들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012년부터 북송이 멸망하는 1278년까지 266년 동안 무려 129회에 걸쳐 약 5000명이 왔다. 송 상인들은 우리 생각과 달리 산둥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