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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무슬림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한 이슬람율법…이교도 잡아 노예로 만들며 인신매매 시장 확대

    중세 중동 지역경제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농업이었다. 하지만 교역에서의 위상은 달랐다. 농산물은 대부분 자가소비용이었다. 농산물은 상하기 쉬웠고 부피는 컸으며, 이윤은 적어 장거리 교역에 적합하지 않았다. 교역품목에서 중동지역을 대표한 것은 직물(textile)이었다. 당시 중동산 직물이 유럽에 대량 수출된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주요 직물제품 명칭은 중동 지방의 주요 도시명에서 나왔다. 모술에서 모슬린(muslin)이, 다마스쿠스에서 다마스크(damask)가 유래했다. 직물 관련 용어들에도 이슬람 세계의 흔적은 남아 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거즈(gauze)는 아랍어 ‘qazz’에서 나왔다. 앙고라 산양에서 채취한 모섬유 모헤어(mohair)는 ‘mukhayyar’라는 아랍어 단어에서 출발했다. 치밀한 조직의 평직물을 가리키는 ‘태피터(taffieta)’ 같은 전문용어도 페르시아어 ‘taftah’가 근원이다. 직물·비단·후추는 주요 중동 교역품중동지역 정착 농민들은 직물업자들에게 아마와 목면을 제공했고, 유목민은 양모와 가죽 공급원이 됐다. 다만 직물산업의 주요 원료였던 목재만은 언제나 부족해서 비싼 값에 외부에서 수입해야 했다. 직물생산은 대부분 가내수공업 형태로 생산자 자신의 필요와 지역 내 수요를 맞추는 수준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직물 제조업자들은 태피스트리와 쿠션, 의복, 각종 복식품을 함께 만들었고 그중 일부는 수출됐다. 이집트 지역에 들어섰던 수많은 왕조는 설탕 제조 노동자와 함께 아마 채취 노동자에게도 국가가 일당을 지급하는 등 적극적으로 직물산업에 개입하기도 했다.알레포나 알렉산드리아 같은 이슬람권 주요 교역항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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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탈하고 쓸모있는 사람을 강제이주시켰던 몽골, 역참 설치해 교류…'진정한 세계화의 첫발' 평가

    칭기즈칸이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서아시아의 패자였던 호레즘과의 일전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218년 몽골이 보낸 상단이 오트라르에서 살해되면서 불거진 호레즘과 몽골의 대결은 칭기즈칸 군대의 ‘잔인함’과 군사적 ‘천재성’이 드러난 계기이기도 했다. 특히 호레즘의 심장이었던 부하라 공략은 칭기즈칸의 번뜩이는 기지가 빛난 순간이었다. 칭기즈칸은 사마르칸트를 경유하는 통상의 루트 대신에 현지인 투항자들을 길잡이로 활용해 키질쿰(붉은 모래) 사막을 횡단하는 강수를 뒀다. 1220년 전방전선 650㎞ 뒤에 있던 부하라 성문 앞에 몽골의 대군이 나타나자 부하라시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저항하면 학살 … 전문가는 몽골로 보내몽골군이 출현하자 방위병들은 400명의 투르크 병사만 성채 안에 남겨둔 채 줄행랑을 쳤다. 부하라 시민들은 다음날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의 지도하에 항복했다. 일부 병사는 부하라시 요새를 점거한 채 12일간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몽골군의 공격에 결국 제압됐다. 이후 몽골군이 부하라에 대해 처한 행동은 이후 트랜스옥사니아 지역에서 칭기즈칸 군대에겐 일종의 행동규범이 됐다. 특히 인력, 고상한 표현으로 인적 자원 처리에 있어서 그러했다. 우선 장인들(특히 무기 제조장인과 방적공)처럼 쓸모 있는 사람들은 엄선돼 동쪽의 몽골지역으로 보내졌다. 젊은이들은 몽골군의 다음 전투에서 활용될 ‘화살받이(arrow fodder)’로 잡혀갔다. ‘화살 폭풍(arrow storm)’이라고 불리는 집단 사격으로 적군의 혼을 빼놨던 몽골군은 적군의 공격에 대한 ‘싸고도 유용한’ 그러면서 ‘살아 있는’ 방어수단도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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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물거래 등 법·제도까지 만들게 한 튤립 투자…계속 오를 것이란 믿음이 사라지자 공황에 빠져

    당나라에서 모란꽃에 대한 투기 광풍이 불었는데 17세기 네덜란드의 모습은 당나라의 재판이었다. 16세기 중반 유럽에 들어온 튤립은 1634년 네덜란드에서 ‘튤립 광풍(tulipomania)’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반까지 확산된다. 부자는 물론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까지 튤립 거래에 뛰어들었고, 사람들이 튤립에 열광할수록 튤립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635년에는 튤립구근 40뿌리에 10만플로린이 투자됐다. 튤립이 너무 고가다 보니 미세한 무게 단위인 ‘그레인(0.064799g)’보다도 작은 ‘페리트’ 단위로 팔렸다. “완벽한 구근은 세상에 두 개만 존재”튤립이 귀한 존재가 되면서 사람들은 튤립을 ‘장군’ ‘제독’ ‘총독’ 등으로 불렀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스키피오 같은 역사상 위인의 이름이 붙기도 했고, ‘장군 중의 장군’ ‘제독 중의 제독’이라는 이름도 등장했다. 19세기 영국 작가 찰스 매케이에 따르면 17세기 튤립 광풍 기간에 ‘리프켄 제독’이라고 이름 붙은 400페리트짜리 튤립은 4400플로린 가치를 평가받았다. ‘반 데르 에이크 제독’ 튤립은 446페리트에 1260플로린으로 가격이 매겨졌다. ‘총독’으로 불린 튤립은 400페리트짜리가 3000플로린이었다. 가장 비싼 튤립은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라는 것으로 200페리트짜리가 5000플로린에 달했다. 이 종자는 상태가 좋지 않은 것조차도 보통 2000플로린은 갔고, ‘완벽한’ 구근은 암스테르담과 할렘에 1개씩 단 두 개만 존재한다고 발표됐다. 할렘에 있는 완벽한 구근을 얻기 위해 12에이커 건축물 부지를 제공하겠다는 제안까지 나왔다. 암스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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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한 채 값을 훌쩍 뛰어넘던 당나라 시대 모란꽃…'네덜란드 튤립'보다 900년이나 앞섰던 투기 광풍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꽃을 사다(買花)’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장안의 봄이 저물려 하니(帝城春欲暮)시끌벅적 마차들이 다닌다(喧喧車馬度)모두들 모란의 계절이 왔다며(共道牡丹時)줄지어 꽃을 사러 간다(相隨買花去)귀천 따라 일정한 값이 없으니(貴賤無常價)낸 돈만큼 꽃송이를 보게 될 터(酬値看花數)(…)집집마다 따라들 하니 풍속이 되어(家家習爲俗)사람마다 정신없이 열중해 깨닫지 못한다(人人迷不悟)어느 늙은 시골 농부가(有一田舍翁)우연히 꽃 파는 곳에 왔다가(偶來買花處)고개 떨구고 홀로 길게 탄식한다(低頭獨長嘆)그 한숨을 알아채는 이 아무도 없다(此嘆無人諭)한 포기 짙은색 모란꽃이(一叢深色花)중농 열 집의 세금이라도(十戶中人賦)시가 묘사하는 것처럼 전성기 당나라 장안에선 오늘날 닷컴 열풍, 부동산 광풍, 펀드 열풍에 버금가는 모란 광풍이 불었다. 모란은 꽃으로 정원과 사원, 각종 연못과 공공기관을 장식하길 좋아하던 당나라 사람들이 최고로 친 꽃이다. 당대 시인 유우석(劉禹錫)은 “연못의 연꽃은 수수하긴 하지만 모란에 비해선 아취가 적다”며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인 모란이 만개할 때 장안 전체가 들뜰 수밖에 없다”고 흥얼거렸다. 부의 상징인 모란꽃모란꽃(사진)에 대한 애착은 수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수와 당 왕실에서 시작돼 민간으로 빠르게 번졌다. 화려함을 좋아하는 장안의 귀족들은 모란을 앞다퉈 사들였다. 연꽃이 불교와 관련된 정신적 고귀함의 상징이었다면 빨간색과 자주색 모란은 부의 상징이었다. 자연스럽게 “여러 꽃을 보았지만, 모란보다 아름다운 건 없다”거나 “오만 가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과시와 낭비가 미덕이었던 '중세시대 기사'…기사가 되려면 10억원대 여유 자금 있어야

    중세시대 기사 한 사람을 부양하는 비용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11세기 말에는 기사가 타는 말 한 마리 가격이 황소 5~10마리 가격과 맞먹었다고 한다. 기사들이 입는 갑옷은 그런 말보다도 훨씬 비싼 럭셔리 제품이었다. 말을 탄 기사는 한마디로 값비싼 이동 요새 같은 존재였다. 비유적 표현일 수도 있지만, 구식 가죽갑옷을 대신해 등장한 사슬(미늘) 갑옷은 말보다 네 배에서 열 배나 비싼 것으로 전해진다. 즉 갑옷 한 벌 가격이 황소 20~100마리에 해당했다. 기사 한 명당 말 세 마리 필요문제는 기사가 된 뒤, 기사 생활을 유지하려면 말이 한 마리만으로는 부족했다는 데 있다. 긴 행군을 하고 나면 말이 지쳐서 막상 전장에 투입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100년 플랑드르 백작이 500명의 기사를 소집했을 때 기사 한 명당 말 세 마리를 보유하도록 주문했다. 말이 세 마리 필요했던 것은 행군마와 전투마, 짐말이 제대로 갖춰져 있어야만 기사가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사 한 명을 부양하기 위해 드는 비용을 오늘날 수준으로 단순 비교해보자면, 소 한 마리를 500만원이라고 가정할 경우 싸게는 1억7500만원(황소 5마리×3+갑옷(황소 20마리))에서부터 6억5000만원(황소 10마리×3+갑옷(황소 100마리))에 이른다는 계산이 나온다. 1000년 전 중세시대 소의 가치가 오늘날보다 훨씬 컸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사로 출사하기 위해서 5억~10억원가량의 여유자금을 굴릴 수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했다.여기에 당시엔 희귀 품목이던 창이나 칼(아서왕의 엑스칼리버 같은 명검의 전설은 그만큼 칼이 귀했던 영향도 있다) 같은 무기류에서부터 종자를 부리고, 먹일 돈도 별도로 포함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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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 출가시켜 주변국 통제하던 중국…위구르 등도 지참금 잇속 최대한 챙겨

    (왕)소군이 옥구슬 안장을 건드리듯(昭君拂玉鞍)말에 오르니 붉은 두 뺨엔 눈물 흐르네(上馬啼紅頰)오늘은 한나라 궁인이지만(今日漢宮人)내일은 오랑캐의 첩이라네(明朝胡地妾)- 이백, 「왕소군(王昭君)」화번공주(和蕃公主). 전통시대 중국에서 정략적인 이유로 이민족 군주에게 출가시킨 공주를 지칭하는 말이다. 물론 중국 천자의 딸이 직접 보내진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역모에 얽힌 황실 종친의 여식이나 먼 친인척, 제왕의 여식 혹은 황실 관계자 등이 주로 ‘대타’로 차출됐다. 예를 들어 당 현종 때인 717년 거란의 왕 이실활(李失活)에게 동평왕(東平王)의 외손 양씨(楊氏)를 영락공주(永樂公主)로 삼아 예물 6000단과 함께 시집보냈다. 726년에는 거란 송막왕(松漠王) 이소고(李邵固)에게 현종의 생질 진씨(陳氏)를 동화공주(東華公主)로 삼아 처로 줬다. 같은 해 요락왕(饒樂王) 이노소(李魯蘇)를 봉성왕(奉誠王)으로 삼고 성안공주(成安公主)의 딸 위씨(韋氏)를 동광공주(東光公主)로 삼아 혼인을 맺었다. 이민족과 화친하기 위해 보내진 ‘화번공주’중국 역사에서 이민족 군장에게 황실과 관련된 여성을 보내는 것은 한(漢)대에 시작됐다. 당(唐)나라 시기에 이르면 돌궐, 위구르, 토번 등을 대상으로 이 같은 형태가 반복됐다. 당나라 시대에는 이민족에게 보내지는 이들 여성을 두고 화번공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민족인 번족(蕃族)과 화친하고, 번족을 회유하기 위함이라는 뜻을 공주의 명칭에 담은 것이다. 주변 민족 입장에서도 중국의 공주를 얻어 당나라와 관계를 맺는 것은 국내외에 권위를 과시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구당서(舊唐書)》「토번전」에는 “토번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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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화폐가 등장할 때부터 끊임없이 반복됐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표현은 널리 알려진 문구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 아닐까 싶다. 일상생활에서 ‘구축’이라는 단어는 “진지를 구축(構築)한다”는 식으로 주로 쓰이기 때문이다. ‘어떤 세력 따위를 몰아서 쫓아냄’이란 뜻을 지닌 ‘구축(驅逐)’이라는 낱말은 이젠 사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법하다. ‘악화’나 ‘양화’란 단어도 쉰내를 폴폴 풍기긴 마찬가지다.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6년간 취해진 ‘양적 완화’ 처방도 따지고 보면 돈의 가치를 떨어뜨려 빚 부담을 줄이는 것이니 어쩌면 오늘날도 악화가 양화를 계속 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 저명한 경제사학자인 갤브레이스는 “역사상 단 한 번도 도전받지 않은 경제법칙”으로 나쁜 돈이 좋은 돈을 쫓아버린다는 소위 ‘그레셤의 법칙’을 꼽기도 했다. 금속화폐의 무게와 순도 조작‘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은 금속화폐가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시작됐다. 금속화폐는 처음에 오늘날 금괴와 비슷한 막대형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고대 로마 시대 플리니우스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고대 로마인들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시대까지 주화를 가지지 않았고 필요한 것을 구매하기 위해선 각인되지 않은 구리덩어리를 썼다”는 ‘전설’을 전했다. 문제는 매번 거래할 때마다 무게와 금, 은의 순도를 확인해야 했다는 점이다. 그런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막대 표면에 무게와 순도를 확인하는 인장을 찍었다. 하지만 인장은 위조하기 쉬웠고, 막대의 일부를 잘라내도 표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이슬람에 밀려 동방과 교역이 끊긴 유럽…모든 것 부족한 '시장 없는 경제'로 추락

    로마제국 멸망 후 이슬람 세력이 흥기하면서 동방과의 교역선이 끊긴 유럽은 자급자족 경제로 쇠퇴하게 된다. 이전까지 갈리아에선 마르세유 등의 무역항을 통해 콘스탄티노플, 이집트,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 파피루스와 향료, 고급 직물, 포도주, 올리브유 등 동방의 생산품이 수입됐다. 하지만 이들 시리아나 동방에서 갈리아 지역으로 유입되던 상품들은 8세기경에 이르면 수입로가 거의 완전히 막힌다. 남아 있던 극소수의 무역선을 통해 동방에 내놓을 만한 것은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수지타산도 맞지 않는 노예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히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수입 줄면서 소박해진 경제활동자연스럽게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상품들이 사라져갔다. 가장 먼저 파피루스가 없어졌다. 서유럽 지역에서 파피루스에 쓴 작품은 대부분 6~7세기 이전의 것이다. 메로빙거 시대에는 왕실 사무국에서 파피루스만 사용했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파피루스에 비해 불편하고 질이 많이 떨어지는 양피지로 대체됐다. 8세기 말까지도 약간의 개인 문서에서 여전히 파피루스가 쓰였지만 이는 예전에 수입해 보관했던 파피루스를 이용한 것이다. 재고가 떨어진 뒤에는 그나마 이런 호사도 불가능해졌다. 벨기에 출신 중세사가 앙리 피렌은 “갈리아에서 파피루스가 사라진 것은 상업이 쇠퇴하고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파피루스뿐 아니라 향신료에 대한 언급도 이 시대 사료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시대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강제로’ 입맛도 단순해졌다. 지중해에서 상업이 재개된 12세기가 돼서야 향신료는 서유럽지역에 다시 등장한다.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