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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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반달족이었지만 로마에 충성한 스틸리코 장군…그를 포용하지 못한 로마는 끝내 쇠락의 길로
오늘날 주요 독일사 개설서에서 ‘역사시대’는 보통 2000여 년 전 로마시대부터 시작한다. 타키투스 등 로마인이 남긴 게르만 각 부족에 대한 설명에서 자국 역사의 근원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나치 집권기에는 설명이 조금 달랐다. 독일의 역사저술가 헤르베르트 로젠도르퍼에 따르면 나치 집권기에는 “5000년 역사의 독일”이라는 문구가 널리 퍼졌다. 기원이 더 오래될수록 민족사가 더 빛날 것이란 생각에 따라 별다른 근거도 없이 ‘1만 년 독일사’를 운운하는 표현도 유통됐다. 하지만 독일인의 기원은 생각보다 훨씬 불명확했다. 로마시대 게르만족의 역사를 그대로 단선적으로 독일사로 서술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로마인이 지칭했던 ‘게르만족’의 범위도 너무 광범위했다. 로마인들이 ‘게르마니아’라고 부른 것은 로마제국 북부 국경 지역에 사는 여러 부족을 통칭하는 표현이었을 뿐이다. 로마인에게 게르만인은 그저 정확한 발원지도 알기 어려운 “건강한 금발의 짐승 같은 족속”이거나 “싸움꾼”에 불과했을 뿐이다.이 같은 배경 아래 독일의 문호 괴테와 실러는 “독일, 어디에 그런 나라가 있는가? 그런 나라를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토로했고, 유명 역사학자 토마스 니퍼다이가 “태초에 나폴레옹이 있었다”고 요약할 만큼 오늘날 독일이 존재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독일 침략이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어떻든 간에 2세기 이후 산발적으로, 4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여기저기서 떠밀린 게르만족은 대대적인 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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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반달족은 어쩌다 야만의 대명사가 됐을까
8만 명이 넘는 북방 야만족 집단이 430년 지브롤터해협을 건넜다. 이 야만족의 정예병들이 북아프리카의 히포 레기우스로 진격했다. 히포는 북아프리카 최대 도시인 카르타고와 로마식 가도가 연결된 상업·군사 요충지였다. 그들은 히포를 지키던 로마 군대와 14개월간 공방전 끝에 결국 함락시켰다. 히포를 점령한 야만족이 바로 반달족이다. 게르만족 일파인 반달족은 본래 2~3세기께 북유럽에서 남하해 폴란드 남쪽 도나우강 유역에 살았는데, 5세기 들어 훈족의 압박과 기후 악화로 인한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 부족 전체가 남쪽으로 이동했다. 반달족은 ‘교활하지만 탁월한 왕’으로 평가받는 가이세리크의 지휘 아래 히스파니아(스페인)로 들어갔으나, 먼저 정착한 서고트족에 밀려 북아프리카로 이주한 것이다.반달족은 5년간 마우레타니아(모로코)와 누미디아(알제리)를 평정하고 최대 도시 카르타고까지 점령한 뒤 반달왕국을 세웠다. 지브롤터해협을 건넌 지 10년 만이다. 그들은 카르타고를 거점으로 시칠리아섬, 샤르데냐섬을 수시로 약탈하고 이탈리아 본토까지 넘봤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서로마제국이 북방 훈족과 게르만족을 방어하는 데 전념하느라 남쪽을 대비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가이세리크의 반달족은 455년 수도 로마의 외항인 오스티아에 상륙했다. 이에 테베레강을 거슬러 로마에 입성했다. 겁에 질린 군중이 무기력한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황제를 살해하자, 교황 레오1세가 가이세리크와 협상해 성문을 열었다. 반달족 병사들은 보름 동안 로마를 철저히 약탈해갔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반달족의 로마 약탈을 ‘로마 겁탈’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