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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대국가로 발전하며 문화정책 힘 쏟은 백제의 유산

    방탄소년단(BTS)의 음악이 연속 3회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적이 있다. 유라시아대륙을 몇 번 횡단했는데, 매번 한류(韓流)의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란의 이스파한시에서는 싸이의 말춤을 시민들과 함께 췄고, 중앙아시아의 사막을 횡단할 때는 “주몽”을 외치며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청년들과 신나게 웃어 젖히기도 했다. 2019년 한국의 문화콘텐츠 수출은 103억달러였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은 2019년 11월 말까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박스오피스 매출이 1억1000만달러에 이른다. 정보, 통신, 건축 등을 포함한 문화산업의 규모와 이익은 이보다 훨씬 더 크다. 기쁘고도 놀랄 만한 현상이다.우리 역사에서는 이 같은 문화산업 및 문화수출 현상이 없었을까? 백제가 멸망할 때 인구는 고구려보다 많은 76만 호(戶), 약 380만 명이었다(《구당서》 《삼국사기》). 농경, 어업은 물론 상업, 무역이 활발하면 국부가 창출되고 경제력이 강해진다.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시대에 예성강 이북까지 북상했고, 마한 지역을 장악한 뒤 일본 열도로 진출했다. 이어 신라와 고구려를 압박했다. 이에 더해 ‘요서 진출설’과 ‘양자강 유역 점유설’이 주장될 정도였으니 군수산업은 분명 활성화돼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환경과 국민정서, 오랜 문화전통으로 인해 문화가 발달했고, 문화정책에 힘을 더 기울인 듯하다. 차원이 다른 예술품 금동대향로1993년 12월, 부여 능산리 절터 유적에서 이를 확신할 수 있는 유물이 발굴됐다. 7세기 전반에 제작된 높이 62.5㎝, 무게 11.8㎏의 ‘금동대향로’다. 이 향로는 뚜껑, 몸체, 받침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받침대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의 성장 막기 위해 일본·중국 남조와 교류하며 성장한 백제

    4세기 말까지 고구려와 백제는 100㎞ 이내의 내륙 공간에서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등장해 백제의 해양기지인 관미성을 점령, 전세가 역전됐다. 태왕은 다시 396년 수륙양면작전을 펼쳐 경기만의 58성, 700여 촌을 함락시키고 한성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해양력이 삼국의 역학관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요서진출설’의 진실은이후 백제는 계속되는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고 동쪽으로는 신라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왜(일본)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었다. 또 양쯔강 하류로 도피한 한족이 세운 송나라, 제나라 등 남조 국가들과 활발하게 교섭을 벌여 국제질서에 진입했다. 반면 선비족이 화북 일대에 세운 북위와 교류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위서>와 <삼국사기>에 실린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이리와 승냥이 같은 것들이 길을 막았으며, (중략) 거친 물결에 배를 띄우고…’라고 기록해 바닷길이 중요했음을 알려준다. 북위도 역시 고구려의 방해가 있었고 바닷길이 험해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지 못했다.그런데 몇몇 사료의 기록을 근거로 이 무렵 백제가 요서지역을 지배했다는 ‘요서 진출설’이 주장됐다. 중국의 <송서>(488년)는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다. (중략) 백제 또한 요서를 침략해 점령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백제가 다스린 지역을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기록했다. <남제서>(6세기 전반)에도 ‘백제군을 두었는데, 고려(고구려)의 동북에 있다’라고 나와 있다. 그 밖에 <양서>와 <남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