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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당나라에 자리잡은 신라인과 고구려·백제 유민들…뛰어난 항해술로 운하경제와 해양무역서 맹활약

    중국은 한때 빈국이었으나 1980년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선택한 후 비약적으로 발전해 미국과 갈등을 벌이는 중이다. 중국의 성공에 기여한 화상(華商)들과 중화 경제권은 8~9세기 동아지중해의 ‘범신라인 공동체’와 흡사했다. 또한 덩샤오핑이 추진한 경제특구 전략은 신라방, 파사방을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윤명철, 《장보고 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 범신라인들의 구성'범신라인 공동체'는 본국 신라인들과 동아시아 지역에 거주한 재당 신라인, 재일 신라인들의 네트워킹 시스템이다. 현재 ‘한민족 공동체’와 ‘한상 연합회’가 섞인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그중 핵심 역할을 담당한 집단은 당나라에 거주하는 ‘재당신라인’(在唐新羅人)들이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재당신라인들은 고구려·백제 유민과 신라인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수적으로 가장 많은 고구려 유민들은 이정기(李正己)일가가 다스린 제나라에 살다가 제가 멸망한 후 ‘신라인’이라는 이름으로 변했다. 백제계 유민들은 전라도 해안 일대에서 임시정부를 따라 일본열도로 탈출했다. 충청도와 경기도 해안지방에서는 황해중부 횡단항로를 이용해 산둥성과 장쑤성 해안에 도착한 후 고구려 유민들과 합세했다. 816년에는 농민들 170여명이 저장성 지역으로 건너왔다. 이 같은 ‘보트피플’들과 승려, 유학생, 심지어는 노예로 팔려온 신라인들은 함께 신라촌을 이루고 살았다. 일종의 ‘신라타운’인 셈이다. 그리고 점차 ‘재당신라인(在唐新羅人)’이라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운하경제와 해양무역에 참여한 재당신라인재당신라인들은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사비로 천도해 해양 활동망 튼튼히 한 백제, 中과 문물 교류·日 적극 진출로 강국 부활

    백제 성왕은 538년 사비(지금의 부여)라는 항구도시로 천도하면서 해양 활동망을 더 튼튼히 구축했고, 왜국에 진출했다. 오사카부 모즈에 있는 오스카(大塚)에선 300개의 철검이 출토됐다. 이곳에는 지금도 구다라촌(백제촌)과 구다라강(백제천)이 있는데 과거에는 와니(王仁)씨, 후네(船)씨, 쓰(津)씨, 후지이(葛井)씨 등 백제계 씨족이 많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그리고 6세기 중반에 이르면 친백제계인 소가(蘇我)씨가 불교가 공인되는 과정에서 신흥세력으로 떠올랐다. 쇼오토쿠 태자가 실권을 장악해 백제의 영향력은 더 강력해졌다. <일본서기>에는 577년 백제왕이 경론 몇 권, 율사, 선사, 비구니, 주금사, 조불공, 조사공 6명과 함께 불상을 보내왔다고 기록돼 있다.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중국의 <북사> <수서>와 같은 사서는 “백제에 왜와 중국사람이 많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백제를 융성시키고 국제적인 위상을 강화시킨 해양활동과 해양력은 어느 정도였을까.웅진은 금강의 하항도시지만 해양으로 진출하는 데는 다소 불편했다. 천도한 사비는 강을 끼고 있으면서 해양과 가깝게 연결되는 일종의 ‘강해도시’였다. 20세기 초까지도 큰 배들이 정박하는 큰 나루(구드래 나루)였다. 필자가 1979년 뗏목으로 금강을 탐사할 때도 부여까지 밀물의 영향이 미쳤다.항해술과 조선술도 발달했다. 백제 선박들은 고구려의 해상권 통제와 북위의 견제 때문에 난도가 높은 항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즉 금강 하구와 영산강 하구 등을 출항해 황해 남부를 횡단하거나, 황해 중부를 횡단하다가 북풍을 이용해 양쯔강 하구로 진입했다. 비록 구체적인 자료나 실물 증거가 빈약하지

  • 과학과 놀자

    해리슨의 항법용 시계가 뱃사람에게 경도를 알려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기세가 꺾일 줄 모르고 있다. 전 세계적 재난 상황에서 많은 나라가 앞다퉈 외국인의 입국은 물론 자국민의 일상적인 통행마저 제한하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아시아인을 향한 혐오와 차별 역시 늘고 있다고 한다. 인종, 국가, 언어, 종교 등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쏟아온 인류의 노력이 단 몇 개월 만에 역행하는 모습은 초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이 사태가 진정된 이후의 세상이 사뭇 염려스럽다.각자 살아남기 위해서는 배척과 차별조차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가 이뤄놓은 세계화가 정치, 문화, 과학, 종교 등 인류의 모든 활동이 복합적으로 일궈낸 성취임을 되새기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화의 불씨를 댕긴 과학의 역할도 한 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인간은 고대 중국에서 실크로드를 개척한 이후 범지구적 교역을 멈춘 일이 없다. 오스만 제국이 육상 교역로를 틀어쥐자, 15세기 유럽인들은 보다 자유로운 교역을 위해 위험천만한 해상 무역도 마다하지 않았다.GPS(위성항법장치)를 비롯한 다양한 항법기술을 갖춘 오늘날과 달리, 당시 선박들은 전후좌우로 수평선만 펼쳐진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기 일쑤였음에도 말이다.바다 위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일은 18세기까지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았다. 1707년 영국 실리 제도 근처에서 4척의 함대가 암초에 부딪히는 대형 사고가 나자, 영국 정부는 급기야 이 문제를 푸는 데 최대 2만파운드(오늘날 50억원 정도)의 상금을 걸기에 이른다.자전 탓에 측정이 어려웠던 경도망망대해에서 표류하지 않으려면 두 개의 좌표, 위도와 경도를 파악해야 한다. 다행히도 위도는-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