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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몽골·티베트 등 아시아 각지로 흩어진 고구려 유민…불모지 개척, 접경세력과 전투에 이용당했다

    나라가 멸망한다는 것은 군대가 전투에서 패하고, 정부가 괴멸하고, 지배계급이 파멸하는 것을 일컫는 게 아니다. 단순히 삶이 비참해지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파멸하고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자는 선조들처럼 명예를 간직한 채 역사에 남았고, 자의든 타의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 ‘유민(流民)’이라는 신분으로 살육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했다. 또 자발적으로 망명하거나 탈출을 시도했고, 일부는 부활에 성공했다. 한민족의 슬픈 ‘디아스포라(diaspora·고국을 떠나는 사람·집단의 이동)’다. 요동지역 고구려인 2만명 이하로 줄어645년, 고당(高唐)전쟁에서 고구려는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요동성(遼東城) 전투에서 패배해 군인과 백성 등 7만여 명이 요주(요서·요동) 등으로 끌려갔고, 다시 1만4000명이 유주(幽州·베이징 일대)로 끌려가 정착했다.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당하면서 보장왕과 연남산 등의 귀족들과 함께 고사계 같은 장군들, 관리들, 기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군인과 백성 등 3만 명이 묶인 채로 중국의 시안(長安)까지 끌려갔다.669년 5월엔 20만 명(《자치통감》엔 3만8200호, 《구당서》엔 2만8200호)이 끌려가 요서지방, 산둥반도, 강회 이남(장쑤성·저장성), 산남(내몽골 오르도스), 경서(산시성·간쑤성), 량주(칭하이성과 쓰촨성이 만나는 주변 지역) 등의 불모지에 분산됐다. 또 679년에는 요동지역의 유민들을 하남(내몽골 오르도스)과 농우(간쑤성과 칭하이성 일대)로 이주시켰다. 이후에도 여러 번 끌려가서 나중에는 요동지역에 남은 사람이 2만 명이 못될 정도로 줄었다(지배선, 《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의 성장 막기 위해 일본·중국 남조와 교류하며 성장한 백제

    4세기 말까지 고구려와 백제는 100㎞ 이내의 내륙 공간에서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등장해 백제의 해양기지인 관미성을 점령, 전세가 역전됐다. 태왕은 다시 396년 수륙양면작전을 펼쳐 경기만의 58성, 700여 촌을 함락시키고 한성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해양력이 삼국의 역학관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요서진출설’의 진실은이후 백제는 계속되는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고 동쪽으로는 신라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왜(일본)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었다. 또 양쯔강 하류로 도피한 한족이 세운 송나라, 제나라 등 남조 국가들과 활발하게 교섭을 벌여 국제질서에 진입했다. 반면 선비족이 화북 일대에 세운 북위와 교류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위서>와 <삼국사기>에 실린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이리와 승냥이 같은 것들이 길을 막았으며, (중략) 거친 물결에 배를 띄우고…’라고 기록해 바닷길이 중요했음을 알려준다. 북위도 역시 고구려의 방해가 있었고 바닷길이 험해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지 못했다.그런데 몇몇 사료의 기록을 근거로 이 무렵 백제가 요서지역을 지배했다는 ‘요서 진출설’이 주장됐다. 중국의 <송서>(488년)는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다. (중략) 백제 또한 요서를 침략해 점령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백제가 다스린 지역을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기록했다. <남제서>(6세기 전반)에도 ‘백제군을 두었는데, 고려(고구려)의 동북에 있다’라고 나와 있다. 그 밖에 <양서>와 <남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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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마군단 못지 않은 정예 수군 보유한 고구려…왕성한 정복·외교활동 펼친 '해륙국가'였다

    고구려는 광활한 만주 벌판을 달리던 기마민족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약소국의 설움 속에서 우리가 꿈꾸고 닮고 싶었던 나라의 이미지다. 일본 학자 에가미 나미오가 주장한 ‘기마민족국가설’이 불을 지른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고구려는 뛰어난 무장력을 갖춘 기마군단을 운용하는 동시에 정예 수군과 왕성한 해양활동으로 이름난 ‘해륙국가’였다.한반도에선 20세기 초까지도 큰 배가 다닐 수 있는 18개의 강을 이용해 교통과 물류가 발전해왔다. 만주는 서북쪽 일부 초원과 건조 지대를 빼놓고는 송화강, 요하, 흑룡강, 모란강을 비롯한 60여 개의 강에서 큰 배들이 다녔다. 비록 사료에는 없지만 자연환경, 역사적 상황, 주변의 유적과 유물들을 보면 고구려 시대에도 강상(江上) 수군이 활동했다. 훗날 조선시대에 와서도 효종이 청나라에 파견한 병사들은 러시아군과 송화강에서 수상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1930년대 초 일본군은 흑룡강에서 강방함대(일본 관동군의 함대)를 운영했다.3세기 오나라와 해상무역고구려는 원조선의 능력을 계승한 데다 전기부터 한반도의 북부와 남만주 일대를 영토로 삼았기 때문에 요동만과 서해 북부, 동해 북부에서 활발한 해양활동을 벌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장거리 항해를 하고 국제적으로 활동한 사례는 3세기 전반에 처음 나타난다. <삼국지>의 주역인 조조, 유비가 차례로 죽고 손권이 위나라와 전쟁을 벌이던 233년,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구려는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오나라에 값비싼 담비가죽 1000장, 할계피(꿩가죽), 전략물자인 각궁(고구려의 활) 등을 보냈으며 두 나라는 우호관계를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