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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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9세기 통일신라때 ‘석등기’ 통해 토지가격 알 수 있죠…당시 귀족·관료는 토지 소유로 조세 거둘 권리 가져
전남 담양군 남면 학선리에 통일신라기에 세워진 높이 3.5m의 석등이 있다(보물111호). ‘개선사(開仙寺)의 석등’이라 한다. 개선사란 절이 언제 세워지고 언제 허물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반이 석등을 찾았을 때, 석등은 물이 가득한 논에 잠겨 있었다. 전남 개선사 석등의 기록 사진 자료는 1933년의 것인데 여전히 중대(中臺) 이하가 논 가운데 묻힌 상태다.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쇠락한 나머지 소중한 문화유산이 방치되고 있는 스산한 풍경이다. 등을 밝힌 불집은 여덟 기둥으로 둘러싸였다. 그 기둥의 표면에 개선사가 석보평(石保坪)의 논을 구입하게 된 전후 사정이 새겨져 있다. 이하 ‘석등기(石燈記)’라 부른다. 석보평은 조선시대엔 석보리라 했으며, 현재는 화순군 이서면 도석리다. 태반이 동복호에 수몰됐다.석등기를 대강 소개한다. 868년 2월 경문대왕과 문의황후, 이들의 큰딸(훗날의 진성여왕)이 발원해 두 등을 걸었다. 그러자 귀족 김중용이 기름값으로 벼 300석을 시주했다. 그것으로 스님 영판이 석등을 세웠다. 891년 스님 입운이 진성여왕이 하사한 벼 100석으로 경주 오호비소리에 사는 공서와 준휴로부터 석보평에 있는 대업(大業) 명의의 물가 논 4결(結)과 구석 논 10결을 정상의 절차를 밟아 구입했다.(이하 생략)석등기는 현재 전하는 최고(最古)의 매전(買田) 기록이다. 거기에 9세기 신라의 지배체제 내지 토지제도의 실상을 전하는 정보가 담겨 있다. 그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1100년을 내려온 비밀이었다.토지매입 가격이 자세히한 가지 비밀은 매매된 토지의 실체에 관한 것이다. 개선사가 14결의 토지를 매입하면서 벼 100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