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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는 귀족들의 농민 수탈이 심해졌다고 썼지만 농업생산력과 농민 권리 커져 조세율은 크게 낮아졌죠

    몽골과의 전쟁 이후 고려의 사회 구성에 큰 변화가 일었다. 전쟁으로 농지가 황폐하자 조세의 수취가 어려워졌다. 귀족·관료에 대한 녹봉 지급이 줄어 그들의 생활이 곤궁해졌다. 1257년 그들에게 수조지(收租地)를 지급하는 제도가 부활했다. 1075년에 시행된 녹봉제는 182년 만에 폐지됐다.‘고려사’의 의도다시 지급된 수조지를 가리켜서는 녹과전(祿科田)이라 했다. 녹과전의 설정은 경기도에 한했다. 왕족과 공신에게도 수조지가 지급됐는데, 별사전(別賜田)이라 했다. 별사전은 경기도의 범위를 벗어나 전국적으로 설치됐다.녹과전 규모는 10∼12세기 전시과(田柴科)에서의 사전(私田)보다 훨씬 컸다. 예컨대 제1과 중서령(中書令)에게 지급된 사전은 100결임에 비해 녹과전은 300결이나 됐다. 특히 별사전의 규모가 커서 산천을 경계로 할 지경이라고 했다. 이 같은 13∼14세기의 토지제도를 두고 후대의 <고려사>는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귀족의 농장에 편입된 농민들은 수탈이 가중됨에 따라 점점 고달파졌다. 농장의 팽창은 정부 재정을 압박했으며, 이는 각종 잡세의 신설을 유발해 농촌 경제를 압박했다. 농민들은 처자를 팔거나 사방으로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이 같은 <고려사> 논조에는 조선 왕조의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10분의 1 수조율의 성립이전에 소개한 대로 고려 왕조의 수조율은 공전과 사전에 따라 달랐다. 공전은 4분의 1, 사전은 2분의 1이었다. 이런 차이는 고려 왕조의 집권적 지배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점차 해소됐다. 12세기 초 고려 왕조는 공전과 사전의 농민을 전호의 지위로 일괄 규정한 다음 사전을 개간한 농민에게 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