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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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삼각무역으로 어떻게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을까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서 해적선 블랙펄호의 선장 잭 스패로는 늘 술에 절어서 산다. 조니 뎁이 연기한 스패로는 흐리멍텅한 눈에 흐느적대며 걷다 가도 상황이 바뀌면 잽싸게 달려가는 유쾌한 인물이다. 스패로 같은 해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술이 바로 럼이다. 럼의 별칭이 ‘해적의 술’ ‘선원의 술’이기도 하다.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당밀을 발효해 증류시켜 만든 게 럼이다. 럼은 위스키, 보드카 같은 증류주답게 무척 독하다. 알코올 도수가 최하 40도다. 럼의 색깔은 투명한 것부터 짙은 갈색까지 다양한데, 오크통에 넣어 숙성시키는 기간과 럼에 캐러멜을 섞는 정도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악마의 창조물’ 설탕과 노예무역럼에 대해 말하다 보면 설탕의 역사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커피나 홍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게 자연스럽지만 근대 초기까지도 설탕은 비싸고 귀한 상류층의 사치품이었다. 설탕은 17세기 초 포르투갈 선교사가 중국의 차를 네덜란드에 전하며 유럽으로 퍼졌다. 홍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차 문화가 만개한 곳은 영국인데, 1662년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가 영국의 왕 찰스 2세와 결혼한 이후 널리 퍼졌다. 18세기에 영국이 해양 패권을 장악하면서 인도 등 동인도산 홍차와 카리브해의 서인도산 설탕이 대거 유입됐다. 신대륙에서 설탕이 들어온 뒤 홍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것이 산업혁명 이후 중산층에도 퍼졌다.유럽인이 설탕을 처음 접한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 때다. 그의 군대가 인도에서 단맛이 나는 식물인 사탕수수를 발견해 가져왔지만, 유럽에는 재배할 곳이 없었다. 카라반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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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양념이 어떻게 금보다 비쌀 수 있을까
인류가 향신료를 이용한 것은 BC 3000년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수메르의 기록에 향신료와 허브에 관한 내용이 있다. 고대 이집트는 미라의 방부 처리에 여러 가지 향신료를 사용했다. BC 1224년 사망한 파라오 람세스 2세 미라의 코에서 후추 열매가 여러 개 발견되었다. 영생과 부활을 기원한 것이다. 후추는 인도가 원산지라는 점에서 당시에도 인도와 이집트 간에 교역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향신료는 적은 양으로도 고기의 풍미를 확 바꿔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부패를 막는 효과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향신료를 약재로 이용했다. ‘향신료의 왕’으로 불린 후추는 화폐로도 통용되어 세금 납부나 뇌물 수수에 이용되었다. 현금처럼 다 되는 후추향신료는 매우 다양하다. 고추 생강 마늘 겨자 파 부추처럼 향이 나고 매운 식물은 모두 향신료로 분류된다. 식물의 잎, 꽃, 열매, 줄기 등 다양한 부위에서 얻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주목받은 열대식물인 후추 계피 정향 육두구를 이르러 ‘4대 향신료’라고 한다. 후추와 계피는 지금도 흔하지만 정향과 육두구는 우리에게 다소 낯설다. 정향은 향신료 중 유일하게 꽃봉오리에서 얻는데 꽃봉오리의 생김새가 한자 ‘丁(정)’자를 연상시켜 붙여진 이름이다. 치약이 없던 시절에 주로 구취 제거, 치통 완화, 감기약 등으로 쓰였다. 육두구는 20m까지 자라는 육두구나무 열매의 씨앗이다. 영어로 ‘nutmeg’는 ‘사향냄새가 나는 호두’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위장을 보호하고 설사를 멈추게 하는 효과가 있어 중국에서는 BC 2000년께부터 쓰였다.4대 향신료는 원산지와 주된 수요처 간 거리가 멀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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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했다
세계를 호령한 로마도 시작은 미약했다. BC 8세기 티베르 강변의 작은 도시국가로 출발해 2세기 거대 제국을 이루기까지 1000년간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가장 취약했던 것이 바다였다. 카르타고와 일전을 벌인 1차 포에니전쟁 전까지 로마는 놀랍게도 대형 전함이 한 척도 없었다.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는 동안에는 바다로 나갈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 강에서 쓰는 소형 전함 20~30척이 전부였다. 그런 로마가 대형 전함이 절실해진 건 바다로 눈을 돌리면서부터다.로마의 첫 타깃은 당시 서지중해의 강자 카르타고가 장악한 시칠리아섬이었다. 로마는 대형 전함 100척 규모의 함대를 계획했지만 건조 기술도 해전의 노하우도 없었다. 그런데 운이 따랐는지 BC 260년 로마로 표류해온 카르타고의 5단 갤리선을 나포해 이 배를 본떠 두 달 만에 갤리선 100척을 만들었다. 로마의 탁월한 모방 능력 덕이었다.물론 배 모양은 형편없었고, 노 젓는 기술부터 배워야 했다. 해전 경험이 없던 로마 함대는 카르타고와의 첫 해전에서 비참하게 깨졌다. 심지어 사령관까지 포로로 잡혔다. 카르타고의 빠른 갤리선은 로마 갤리선에 바짝 붙어 지나갔다. 카르타고는 그렇게 로마 갤리선의 노를 부러뜨린 뒤 움직일 수 없게 만들고 옆구리를 들이받아 침몰시키는 전법을 썼다.초기에 로마는 카르타고에 밀렸다. 그러나 로마인은 창의성과 실용성이 남다른 민족이었다. 정상 해전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보고 코르부스를 개발했다. 코르부스는 끝에 날카로운 송곳이 달린 긴 나무판자로 일종의 잔교(다리 모양의 구조물)였다. 로마군은 카르타고 갤리선 갑판에 코르부스를 내려박아 자신들의 배와 고정시킨 뒤 정예병이 이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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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엔히크 왕자의 모험
인류는 매우 오랫동안 세습적 신분 사회를 유지해왔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결정된 신분에 따라 살아야 했고, 타고난 신분에서 벗어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면서 기나긴 인류 역사와 함께해온 신분제가 타파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며 그전까지는 소수의 권력자만이 독점했던 부를 수평적 경쟁으로 누구나 얻을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슘페터의 기업가정신자연히 신분적 불평등이 해소되면서 타고난 신분에 따라 차별받던 개인의 존엄이 평등하게 변화했다. 누구든 자기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부유해질 수 있는 사회에서는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개인의 역량과 노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이처럼 자본주의는 신분제 사회를 무너뜨린 일종의 혁명이자 인류가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며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도록 한 성장 방식이다. 부를 창출하는 다양한 기회를 보장하며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통해 더 나은 삶으로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동기 부여, 그것이 곧 자본주의다.자본주의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기업과 기업가다. 기업은 근로자를 고용하고 물건을 생산하는 경쟁의 주체, 기업가들은 새로운 시장과 산업을 창조하며 엄청난 사회적 발전을 이끄는 선도자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슘페터는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기업가와 기업가정신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명명했다. 기업의 부가 단지 물질적 가치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생활과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봤기 때문이다.포르투갈의 발전과 왕자예를 들어 15~16세기 유럽의 폭발적인 성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