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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倭의 침공 맞서 해양력 강화한 신라…삼국통일의 토대 쌓았다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시마네(島根)현, 돗토리(鳥取)현, 후쿠이(福井)현 지역에서는 우리, 특히 신라계와 연관된 유적과 유물, 이야기는 물론이고, ‘시라기(신라)’라는 지명도 많이 남아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실린 신라 왕자인 ‘아메노히보코(天日槍(천일창) 또는 天之日矛(천지일모))’가 8개(또는 7개)의 보물을 갖고 도착해 활동한 지역들이다. 일본 신화에서 가야계인 태양여신과 격돌을 벌인 해양과 폭풍의 신인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신라계다. 그는 패배한 뒤 근국(뿌리 나라)인 신라로 돌아갔다. 또 다른 기록에는 그가 신라국에서 흙배를 타고 이즈모에 내려왔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계의 일본 진출시마네현 이즈모의 고진타니 유적에서는 358개의 청동칼이 나왔고, 청동창, 동탁(제사용 방울) 등의 금속제품들이 출토됐다. 신라에서 제철(製鐵) 집단이 진출했고, 이들이 철광산을 발견하면서 대량으로 무기와 농기구를 생산했으며, 거대한 고분군들이 증명하듯 소국들을 세웠다. 결국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시마네현 주민들은 신라인 피가 많이 섞여 있는 것이다.그런데 <삼국사기>는 왜인의 침입은 상세하게(?) 기록한 반면 신라인의 진출은 기록을 안 해서 결과적으로 역사와 자존심을 왜곡시켰다. 다행스럽게도 <삼국유사>에는 157년에 근오기(영일만)에 거주하던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바위’를 타고 동해를 건너가 일본 땅에서 소국의 왕과 왕비가 됐다는 기록이 있다. 아름답고 신비한 사연이 담긴 이 신화는 중앙정부와 갈등을 일으킨 ‘해와 달’을 숭배하는 제사 집단이 혼슈 남부의 이즈모 지역으로 진출했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경주, 수로 교통 발달한 해항 도시…초기부터 일본 혼슈 진출

    신라는 진한 12국 가운데 하나인 사로국을 중심으로 출발했다. 4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자체 통일을 완수하지 못했으며, 초기부터 가야는 물론 왜 세력의 침공을 받는 수난을 겪었다. 학자들은 신라가 고대국가로 늦게 발전한 원인을 영역이 동남부 내륙지방에 국한돼 고립됐고, 수도가 교통이 불편한 분지였다는 데서 찾는다. 항구 도시 경주의 선택정말 그럴까?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한전(韓傳)에 따르면 진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해 한국에 온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이들은 산둥(山東)이나 랴오둥(遼東) 등의 해안가에 살았던 동이족들로 뱃길을 이용해 서해를 건너왔으며, 후에는 중국 지역과 무역을 벌였다. 또 변진(가야의 전신)과 마찬가지로 바다를 건너 제주도의 주호, 일본 열도의 왜 등과 철 등을 무역했다. 그렇다면 진한을 계승한 신라는 초기부터 교역망과 해양 활동 능력이 발달했을 것이다.수도인 경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큰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가 우물과 관련된 여인(水神)과 결혼해 건국한 땅이다. 이런 신령성 때문에 ‘금성(金城·신령스러운 도읍)’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경주는 실제로는 지정학적이고 지경학적인 가치가 풍부했으며, 이는 해양 활동과 깊이 연관돼 있다. 국가 항구로 사용된 감포경주시에서 북쪽으로 형산강을 따라가다 보면 포항 영일만에서 동해로 들어간다. 아달라왕 때인 157년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라는 제사집단이 일본 열도를 향해 출항한 ‘도기야’가 있다. 또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을 넘어서 내려가면 감포가 있다. 면적은 좁지만 직선 거리로는 경주와 불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사비로 천도해 해양 활동망 튼튼히 한 백제, 中과 문물 교류·日 적극 진출로 강국 부활

    백제 성왕은 538년 사비(지금의 부여)라는 항구도시로 천도하면서 해양 활동망을 더 튼튼히 구축했고, 왜국에 진출했다. 오사카부 모즈에 있는 오스카(大塚)에선 300개의 철검이 출토됐다. 이곳에는 지금도 구다라촌(백제촌)과 구다라강(백제천)이 있는데 과거에는 와니(王仁)씨, 후네(船)씨, 쓰(津)씨, 후지이(葛井)씨 등 백제계 씨족이 많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그리고 6세기 중반에 이르면 친백제계인 소가(蘇我)씨가 불교가 공인되는 과정에서 신흥세력으로 떠올랐다. 쇼오토쿠 태자가 실권을 장악해 백제의 영향력은 더 강력해졌다. <일본서기>에는 577년 백제왕이 경론 몇 권, 율사, 선사, 비구니, 주금사, 조불공, 조사공 6명과 함께 불상을 보내왔다고 기록돼 있다.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중국의 <북사> <수서>와 같은 사서는 “백제에 왜와 중국사람이 많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백제를 융성시키고 국제적인 위상을 강화시킨 해양활동과 해양력은 어느 정도였을까.웅진은 금강의 하항도시지만 해양으로 진출하는 데는 다소 불편했다. 천도한 사비는 강을 끼고 있으면서 해양과 가깝게 연결되는 일종의 ‘강해도시’였다. 20세기 초까지도 큰 배들이 정박하는 큰 나루(구드래 나루)였다. 필자가 1979년 뗏목으로 금강을 탐사할 때도 부여까지 밀물의 영향이 미쳤다.항해술과 조선술도 발달했다. 백제 선박들은 고구려의 해상권 통제와 북위의 견제 때문에 난도가 높은 항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즉 금강 하구와 영산강 하구 등을 출항해 황해 남부를 횡단하거나, 황해 중부를 횡단하다가 북풍을 이용해 양쯔강 하구로 진입했다. 비록 구체적인 자료나 실물 증거가 빈약하지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의 성장 막기 위해 일본·중국 남조와 교류하며 성장한 백제

    4세기 말까지 고구려와 백제는 100㎞ 이내의 내륙 공간에서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등장해 백제의 해양기지인 관미성을 점령, 전세가 역전됐다. 태왕은 다시 396년 수륙양면작전을 펼쳐 경기만의 58성, 700여 촌을 함락시키고 한성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해양력이 삼국의 역학관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요서진출설’의 진실은이후 백제는 계속되는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고 동쪽으로는 신라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왜(일본)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었다. 또 양쯔강 하류로 도피한 한족이 세운 송나라, 제나라 등 남조 국가들과 활발하게 교섭을 벌여 국제질서에 진입했다. 반면 선비족이 화북 일대에 세운 북위와 교류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위서>와 <삼국사기>에 실린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이리와 승냥이 같은 것들이 길을 막았으며, (중략) 거친 물결에 배를 띄우고…’라고 기록해 바닷길이 중요했음을 알려준다. 북위도 역시 고구려의 방해가 있었고 바닷길이 험해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지 못했다.그런데 몇몇 사료의 기록을 근거로 이 무렵 백제가 요서지역을 지배했다는 ‘요서 진출설’이 주장됐다. 중국의 <송서>(488년)는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다. (중략) 백제 또한 요서를 침략해 점령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백제가 다스린 지역을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기록했다. <남제서>(6세기 전반)에도 ‘백제군을 두었는데, 고려(고구려)의 동북에 있다’라고 나와 있다. 그 밖에 <양서>와 <남사>는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장기 저성장에도 엔화 가치는 '탄탄'…두 얼굴의 일본, 경제대국 계속 유지할까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본 경제 이야기입니다. 일본 경제는 상반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늘 시들시들한 모습인데요. 또 다른 한편으로 가장 안전한 자산인 엔화로 인해 일본은 가장 안전한 투자의 도피처가 되곤 합니다.오랜 저성장으로 중국에 추월당한 일본시들시들한 모습부터 살펴볼까요?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일본의 경제성장률을 -6.2%로 전망했습니다. 소득이 6%나 줄어든다는 말이죠. 블룸버그의 예측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2분기, 즉 4월부터 6월까지의 성장률을 -21.5%로 내다봤습니다. 20% 넘게 소득이 감소한다면 거의 재앙 수준이죠. 여러 해 동안 저성장이 계속돼 온 뒤라 고통이 상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2000년 이후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의 경제성장률을 보면 일본이 최하입니다. 대부분 2% 아래이고 마이너스일 때도 제법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던 경제 규모가 중국에 따라 잡히게 됐습니다. 이제는 중국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입니다.안전자산으로 가치가 올라가고 있는 엔화성장률이 이런데도 일본 돈 엔화의 위상은 튼튼합니다. 세계의 주가가 급락했을 때 엔화 가치의 변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6월 8일부터 11일까지 미국 주식가격을 보여주는 다우존스지수가 27,572에서 25,128로 8.9% 떨어졌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2차 유행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미 달러에 대한 엔화의 가치는 1.5% 올랐습니다. 세상의 위험이 커진 만큼 엔화에 대한 수요가 늘었고 가치도 오른 겁니다. 또 다른 안전자산인 금의 가치도 같은 기간 1.7% 올랐습니다.일본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 230%는 타국의 추종을 불허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블룸버그는 왜 영화 기생충이 틀렸다고 했을까?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작년 5월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더니 올해 1월 골든글러브 수상에 이어 아카데미 작품상도 수상했습니다. K팝에 이어 K무비의 시대가 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단한 일이죠. 하지만 이거 마냥 축하할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영화의 내용이 문제죠. 기생충 같은 영화가 성공을 거둘수록 한국인들의 불만과 불행이 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한국의 소득불평등도 미국·일본보다 낮아영화 기생충은 같은 집에서 동거하는 두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낸 블랙 코미디입니다. 부잣집에 가난한 가족이 더부살이를 하는 거죠. 두 집안 사람들의 상호작용 갈등 같은 상황을 유머 코드에 실어 실감나고 흡인력 있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날카로운 내용을 유머러스하게 담아냈다고 해서 블랙 코미디입니다. 제가 걱정하는 부분은 영화를 보고 크게 공감한 관객일수록 한국 사회의 빈부격차를 격렬하게 느낄 거라는 겁니다. 우리 사회에 대한 불만도 커지겠죠.그런데 외신이 뜻밖의 기사를 냈습니다. 블룸버그통신이 기생충의 내용을 다룬 겁니다. 올해 1월 기사에서 한국 사회의 소득불평등이 기생충에 그려진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블룸버그가 제시하는 근거는 지니계수와 소득 5분위 배율, 그리고 최상위 1%의 소득비율 등을 근거로 제시했는데요. 지니계수만 볼까요? 한국의 지니계수는 0.32인데 이는 아시아에서 동티모르를 제외하면 가장 낮은 수준입니다. 지니계수는 작을수록 소득분포가 평등함을 나타냅니다.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같은 선진국들보다 한국의 지니계수가 더 낮습니다.소득수준 올라도 가난하다

  • 경제 기타

    정치적 실권 없이 상징성만…日은 부계 승계·英은 여성도 계승

    지난달 22일 일본에선 나루히토(德仁) 일왕의 공식 즉위식이 열렸다. 나루히토 일왕은 올 5월 즉위했지만 대내외에 즉위를 선언하는 행사를 별도로 마련한 것이다. 일본 왕실은 8세기 헤이안(平安) 시대부터 왕위 계승과 별개로 대외적으로 즉위를 공식 선언하는 의식을 해왔다. 일왕 즉위식을 계기로 왕정(王政)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왕이 국민을 다스리는 정치체제는 역사책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과거 제도로 보이지만 동양과 서양에선 일본과 영국이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며 왕정의 명맥을 잇고 있다.입헌군주제로 맥 잇는 왕정일본의 왕정과 함께 서구의 대표적 왕정인 영국은 왕이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라는 점, 실제 국가 최고지도자 역할은 총리가 담당하고 있는 점에서 비슷한 부분이 적지 않다. 한편으로는 두 나라 간의 역사·문화적 차이에 따라 왕정의 운용 방식이 적잖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영국은 엘리자베스2세 현 여왕이 장기 집권하고 있는 만큼 즉위식 추억은 19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3년 6월 2일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된 엘리자베스2세 대관식은 왕실 행사로는 처음으로 전 세계에 TV로 생중계됐다. 당시 영국에서만 2700만 명이 대관식을 시청했다.영연방 국가들의 상징이 금실로 자수된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엘리자베스 여왕은 1333개의 다이아몬드와 169개의 진주로 장식된 ‘조지4세 왕관’과 1.8㎏의 순금으로 제작된 ‘성 에드워드 왕관’을 차례로 썼다. 버킹엄궁에 돌아와선 ‘대영제국 왕관’을 쓰는 상징적인 행위를 반복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의 최고 지배자이자 영연방을 아우르는 존재라는 상징적

  • 커버스토리

    일본 기초과학 튼튼…노벨 물리 11명·화학 8명·의학상 5명 배출

    올해로 역대 노벨과학상 수상자는 616명이 됐다. 물리학상 213명, 화학상 184명, 생리의학상 219명이다. 최근엔 연구네트워크를 구축한 2~3명의 공동수상이 많아졌다. 일본과 한국의 기초과학 경쟁력은 마치 성인과 어린아이처럼 격차가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조선이 근대 열강의 놀이터로 전락한 1900년 전후 일본은 이미 국가적으로 물리학 연구에 몰두했다. 이는 194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으로 이어졌다.30~50년 장기연구가 기본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는 유카와 히데키다. 핵을 구성하는 입자 중 하나인 ‘메존(중간자)’을 발견한 공로로 1949년 물리학상을 받았다. 유카와의 스승이 ‘일본 현대물리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니시나 요시오다. 니시나는 영국 독일 등 당대 최고 과학자들과 교류하며 2차 세계대전 와중에 이미 여러 대의 ‘가속기’ 개발을 주도했다. 가속기는 ‘노벨상 수상의 필요조건’이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연구장비다. 유카와와 함께 니시나의 또 다른 제자인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1965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일반인에게도 친숙한 ‘리처드 파인먼’이 1965년 도모나가와 공동 수상했다.일본은 올해로 스물네 번째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수상 분야는 기초과학 분야가 압도적이다. 물리학상 11명, 화학상 8명, 생리의학상이 5명이다. 일본이 소재 등 기초과학이 강한 이유를 잘 설명한다.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과 100년 이상 축적된 과학기술이 어우러진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권이 바뀌어도 기초과학 정책은 그대로 이어지는 정치 문화도 또 다른 이유다. 기초과학 일본 수상자는 2000년대 들어 다시 늘어나는 추세다.노벨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