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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누구나 고기를 먹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소는 중요하고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그러나 농부가 트랙터, 경운기 역할을 하는 소를 잡아먹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소를 잡더라도 고기를 장기간 보관할 수도 없었다.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인간을 ‘빵을 먹는 존재’로 정의했듯이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곡물을 경작(cultivate)해 빵을 만드는 것이 곧 문화(culture)이자 문명이었다. 유럽 북부의 게르만족, 켈트족 등이 즐기는 육식은 야만으로 간주됐다.소는 식용으로 거의 키우지 않았다. 초지가 부족해 종일 풀을 뜯는 소를 고기로 먹는 것이 비경제적이었던 탓이다. 그래도 영양 보충을 위한 육식은 필수였다. 로마시대 상류층의 연회에서는 주로 돼지나 양, 닭, 오리 등의 고기를 먹었다. 대다수 평민은 ‘빵과 서커스’ 정책에 따라 무상으로 돼지고기와 기름이 배급될 때나 맛볼 수 있었다.육식은 게르만족이 지배계급으로 올라선 중세에도 선호됐다. 특히 프랑크왕국에서는 육식 금지가 무장해제와 동일한 처벌로 간주됐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기, 특히 소고기는 여전히 왕과 귀족이나 먹는 귀한 음식이었다. 농노들은 어쩌다 고기가 생기면 스프나 스튜로 먹었을 뿐 주식은 빵이었다. 그나마 해마다 곡식을 모두 소진한 늦겨울과 아직 덜 자란 한여름에는 굶주림이 되풀이됐다.15세기 말 대항해시대도 소고기와 연관이 있다. 모험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먼바다로 나간 것은 이슬람 세력에 의해 막힌 후추 수입항로 개척이 주목적이었다. 냉동 냉장기술이 없어 고기 부패를 막고 풍미를 살리는 후추 등 향신료가 필수였기 때문이다. 소고기, 음식에서 요리로고기를 불에 구은 스테이크는 본래 북유럽의 거친 야만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면은 어떻게 세계의 식단으로 자리잡았을까

    국수는 누구나 좋아한다. 밥보다 면을 더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인이 먹는 짜장면은 하루 150만 그릇으로 추정된다. 또 세계라면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은 라면을 연간 38억 개, 1인당 76개를 먹는다. 연간 소비량은 7위지만, 1인당 소비량은 2위 베트남의 52개를 앞서 단연 1위다. 한국인만 그런 것도 아니다. 면 요리는 아시아와 이탈리아를 넘어 세계인의 주요 식단으로 자리잡았다.국수는 한자로 면(麵), 영어는 누들(noodle)이다. ‘noodle’은 독일어로 국수를 뜻하는 누델(nudel)에서 왔다는 설과 라틴어로 매듭을 가리키는 노두스(nodus)가 어원이라는 설이 있다. 로마시대의 유적에서 파스타를 만드는 도구가 발견된 것을 보면 후자가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누들로드 위의 밀과 국수국수는 쌀 메밀 등으로 만들지만 주원료는 밀이다. 밀은 BC 7000년께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처음 재배됐다. 이 지역에서 사용한 맷돌이 유물로 남아있다. 밀은 쌀과 달리 6~7겹의 질긴 껍질을 벗기고 빻아 밀가루를 채취하기까지 상당한 기술과 노동력이 필요하다. 반면 기온과 습도가 높은 아시아에서는 밀 대신 쌀을 주로 재배했다. 쌀은 노동집약적이면서 밀보다 산출량이 많아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다.밀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BC 5000년께 중국으로 전래됐다. 황하유역은 기후가 서늘하고 건조해 밀 재배에 적합했다. 국수도 밀과 함께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서 번성했다. 거꾸로 중국의 국수 문화가 중동과 유럽에 전파됐다는 주장도 있다. 황하 상류의 라지아 지방에서 BC 2000년께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국수의 흔적이 발견돼 중국 기원설의 증거로 제시됐다. 그러나 국수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중세 유럽에서 맥주 제조를 권장한 이유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뮌헨에서는 해마다 9월 말~10월 초에 2주간 옥토버페스트가 열린다. 옥토버페스트는 독일어로 ‘10월의 축제’라는 의미다. 1810년에 시작된 세계 최대의 민속 축제이자 맥주 축제로 유명하다. 맥주 종주국답게 독일의 옥토버페스트를 즐기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한 해에 600만~700만 명이 몰려든다.옥토버페스트는 독일 연방에 속하는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왕자와 작센 공국의 테레제 공주가 1810년 10월 12일 뮌헨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1주일간 축하연을 연 것이 그 유래다. 나폴레옹전쟁 시기에 띄엄띄엄 열리다 1819년부터 뮌헨시 주최로 연례행사가 됐다. 200년 동안 1·2차 세계대전 등 전쟁과 전염병 확산 등으로 24차례 열리지 못했고, 1980년에는 폭탄테러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빼놓을 수 없는 독일의 관광 명물로 자리잡았다. ‘즐거움 그것은 맥주, 괴로움 그것은 원정’맥주는 영어로 beer다. 독일어 Bier, 프랑스어 biere, 이탈리아어 birra와 비슷하다. 맥주의 어원에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문명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 언어로 빵죽을 뜻하는 바피르(bappir). 둘째, 고대 게르만족 언어로 보리 곡물을 가리키는 베레(bere). 셋째, 라틴어로 마신다는 의미의 비베레(bibere)가 그것이다. 라틴어로 맥주는 ‘케르비시아’이다. 케르비시아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곡물, 대지의 여신 케레스에서 온 명칭이다. 중세에 갈리아인이 집집마다 만든 곡주인 세르부아즈, 스페인어로 맥주를 뜻하는 ‘세르베사’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맥주를 보리로 만들었고 고대부터 즐겨 마셨으니 어원이 이해가 되지만 수메르어로 빵죽이란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보험과 주식거래가 이루어진 곳, 커피하우스

    커피의 원산지는 아프리카 북동부 에티오피아이고 인공재배를 시작한 곳은 아라비아반도 남서부 예멘이다. 예멘과 에티오피아는 홍해를 사이에 둔 경쟁 관계였다. 6세기에 에티오피아가 예멘을 지배해 자연스레 커피가 전파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9세기쯤 커피가 아라비아반도의 메카, 제다 등지로 전파됐지만 이슬람권 전역에서 유행한 것은 15세기 들어서다. 아랍어로 커피를 가리키는 ‘까흐와’는 술을 뜻하기도 한다. 술이 금지된 이슬람 세계에서 커피는 일종의 비약(秘藥)이자 와인 대체재로 여겨졌다.처음에는 커피를 으깨서 환약 형태나 빵에 발라 먹었다. 생두를 볶아 따뜻한 물에 넣어 마신 것은 13세기 들어서다. 커피는 수도자의 졸음방지제, 의사의 치료제에서 점차 부유한 이들의 사치품으로 변했다. 15세기에 이르러서야 지금처럼 로스팅한 원두를 갈아 물에 타 마셨다. 커피는 이슬람권에서 고수익 상품으로 거래됐는데, 이슬람식 커피하우스 ‘카베 카네스’가 생겨나 일반인도 쉽게 커피를 즐기게 된 것이다. 교황의 세례를 받은 커피 ‘기독교도 음료’가 되다오스만제국은 1536년 예멘을 점령한 뒤 모카항을 통해 커피콩 수출에 나섰다. 커피를 모카에서 이집트의 수에즈까지 배로 보내면 낙타에 실어 알렉산드리아로 가져간 뒤, 베네치아나 프랑스 상인들에게 팔았다. 모카가 커피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배경이다.유럽에서는 커피를 이교도나 마시는 ‘사탄의 음료’ ‘악마의 유혹’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중동, 이집트를 여행하며 커피를 맛본 유럽인이 차츰 늘고, 의사와 식물학자가 커피의 효능을 인식하면서 거부감은 옅어졌다. 일설에는 가톨릭 사

  • 역사 기타

    '퍼스트 펭귄'이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까닭

    새로운 분야에 최초로 진출한 기업은 시장을 선점하고, 후속 경쟁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독점적인 이익을 누리게 마련이다. 선발자는 경쟁자의 싹을 꺾기 위해 공급 확대, 가격 인하 등으로 진입 장벽을 높일 수도 있다. 경영학에서는 이를 ‘선발자의 이익’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선발자가 항상 유리한 것은 아니다. 선발자는 문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선발자가 독점 이익을 누리기도 전에 후발자가 진입하면 오히려 그동안 투입한 비용을 제대로 못 건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을 ‘선발자의 불이익’이라고 한다.선발자가 겪게 되는 이익과 불이익의 양면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퍼스트 펭귄’이다. 남극에 떼 지어 사는 무리가 먹이를 구하려면 무조건 바다로 들어가야 한다. 바닷속에는 바다표범, 범고래 등 천적들이 즐비하다. 이때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드는 펭귄이 ‘퍼스트 펭귄’이다. 이런 개념을 주창한 랜디 포시 미국 카네기멜론대 교수는 퍼스트 펭귄을 불이익과 고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보상이 따르는 도전정신으로 설정했다. 영국이 겪은 ‘선두주자의 벌금’대항해시대에 앞장서 먼바다로 나간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향신료 무역에서 오래도록 선발자의 이익을 누렸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지중해 바깥세상을 알지 못할 때, 두 나라는 세계를 양분했을 만큼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두 나라는 식민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은과 향신료에 취해 현실에 안주하며 서서히 쇠퇴했다.뒤이어 18세기 후반에 영국이 세계의 선두 주자로 올라섰다. 방적기, 증기기관으로 대표되는 산업혁명을 통해 유럽 변

  • 역사 기타

    양념이 어떻게 금보다 비쌀 수 있을까

    인류가 향신료를 이용한 것은 BC 3000년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수메르의 기록에 향신료와 허브에 관한 내용이 있다. 고대 이집트는 미라의 방부 처리에 여러 가지 향신료를 사용했다. BC 1224년 사망한 파라오 람세스 2세 미라의 코에서 후추 열매가 여러 개 발견되었다. 영생과 부활을 기원한 것이다. 후추는 인도가 원산지라는 점에서 당시에도 인도와 이집트 간에 교역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향신료는 적은 양으로도 고기의 풍미를 확 바꿔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부패를 막는 효과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향신료를 약재로 이용했다. ‘향신료의 왕’으로 불린 후추는 화폐로도 통용되어 세금 납부나 뇌물 수수에 이용되었다. 현금처럼 다 되는 후추향신료는 매우 다양하다. 고추 생강 마늘 겨자 파 부추처럼 향이 나고 매운 식물은 모두 향신료로 분류된다. 식물의 잎, 꽃, 열매, 줄기 등 다양한 부위에서 얻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주목받은 열대식물인 후추 계피 정향 육두구를 이르러 ‘4대 향신료’라고 한다. 후추와 계피는 지금도 흔하지만 정향과 육두구는 우리에게 다소 낯설다. 정향은 향신료 중 유일하게 꽃봉오리에서 얻는데 꽃봉오리의 생김새가 한자 ‘丁(정)’자를 연상시켜 붙여진 이름이다. 치약이 없던 시절에 주로 구취 제거, 치통 완화, 감기약 등으로 쓰였다. 육두구는 20m까지 자라는 육두구나무 열매의 씨앗이다. 영어로 ‘nutmeg’는 ‘사향냄새가 나는 호두’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위장을 보호하고 설사를 멈추게 하는 효과가 있어 중국에서는 BC 2000년께부터 쓰였다.4대 향신료는 원산지와 주된 수요처 간 거리가 멀었기에

  • 역사 기타

    산업혁명 이전의 가장 빠른 '탈 것'은 말이었다

    BC 344년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에게 그리스 테살리아의 말 장수가 말을 팔러 왔다. 하지만 말이 너무 사납고 거칠어 용맹한 장군들조차 다루지 못했다. 필리포스 2세가 말을 사지 않겠다고 하는데, 열두 살짜리 어린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나섰다. 알렉산드로스는 흥분한 말을 부드럽게 달래더니 가볍게 올라타고 달렸다. 그는 말이 자기 그림자에 놀라 겁먹은 것을 알고, 그림자를 보지 못하게끔 말머리를 태양 쪽으로 돌린 것이었다. 이에 감탄한 필리포스 2세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네게 맞는 왕국을 찾아라. 마케도니아는 너를 만족시키기에 너무 좁다.”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나오는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명마 부케팔로스에 얽힌 이야기다. 명장은 명마와 더불어 탄생한다. 대제국을 건설하고 33세에 요절한 알렉산드로스대왕(BC 356~BC 323)이 그렇다. 이탈리아 폼페이 유적에는 알렉산드로스가 부케팔로스를 타고 있는 그림이 있다. 당시 화폐에 부케팔로스가 새겨지기도 했다.서양에 부케팔로스가 있다면 동양에는 적토마가 있다. 나관중의 장편 역사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여포와 관우가 탔던,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준마다. 주인으로 모신 관우가 죽자 적토는 스스로 풀과 물을 끊고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인류와 말이 맺은 6000년 인연말은 라틴어로 ‘에쿠스’라고 부른다. BC 1만3000년께 프랑스 라스코동굴 벽화에 온전한 야생마가 그려졌을 만큼 인류와 말의 관계는 오래됐다. 말이 가축화된 것은 신석기시대인 BC 4000년께 우크라이나 지방에서다. 개가 BC 1만 년에, 돼지가 BC 8000년에, 소가 BC 6000년에 가축화된 것에 비하면 말은 가축화가 매우 늦

  • 역사 기타

    대항해시대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넘어서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시절, 지중해 사람들이 ‘세상의 끝’으로 여겼던 곳이 있다. 지중해 서쪽 끝 지브롤터해협에 있는 일명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다.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지브롤터해협의 고대 명칭이다. 두 기둥은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유럽의 이베리아반도 사이 좁은 해협의 남과 북에 솟은 바위산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쪽 기둥은 이베리아반도 남단의 영국령 지브롤터에 속해 있는 해발 425m의 지브롤터 바위산이다. 그러나 남쪽 기둥은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지 남겨진 기록이 없다.그리스신화에서 묘사하듯이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곧 세상의 끝으로 여겨졌다. 배를 저어 더 나아갔다가는 세상 끝의 어둠과 지옥으로 추락한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고대의 진입금지 경고판인 셈이다.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헤라클레스의 기둥 너머에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가 있다고 한 것이 대서양(Atlantic Ocean)이라는 이름의 유래다. 단테도 《신곡: 지옥 편》에서 “인간이 더 이상 넘어가지 못하도록 헤라클레스가 경계선을 표시해둔 좁다란 해협…”이라고 언급했다.이렇듯 고대인의 세계관은 헤라클레스의 기둥 안쪽, 즉 지중해에 국한됐다. 이는 지리적 제한일 뿐 아니라 생각의 한계를 규정하는 경계선이기도 했다. 누구도 그 너머 미지의 공포에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지브롤터해협을 넘어간 사람들이 연 대항해시대모두가 헤라클레스의 기둥 너머 세상을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다. 진취적인 해양민족인 페니키아(카르타고)인은 서부 지중해를 누비면서 헤라클레스의 기둥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대서양에 면한 포르투갈, 모로코 해안까지 진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