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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양념이 어떻게 금보다 비쌀 수 있을까

    인류가 향신료를 이용한 것은 BC 3000년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수메르의 기록에 향신료와 허브에 관한 내용이 있다. 고대 이집트는 미라의 방부 처리에 여러 가지 향신료를 사용했다. BC 1224년 사망한 파라오 람세스 2세 미라의 코에서 후추 열매가 여러 개 발견되었다. 영생과 부활을 기원한 것이다. 후추는 인도가 원산지라는 점에서 당시에도 인도와 이집트 간에 교역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향신료는 적은 양으로도 고기의 풍미를 확 바꿔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부패를 막는 효과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향신료를 약재로 이용했다. ‘향신료의 왕’으로 불린 후추는 화폐로도 통용되어 세금 납부나 뇌물 수수에 이용되었다. 현금처럼 다 되는 후추향신료는 매우 다양하다. 고추 생강 마늘 겨자 파 부추처럼 향이 나고 매운 식물은 모두 향신료로 분류된다. 식물의 잎, 꽃, 열매, 줄기 등 다양한 부위에서 얻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주목받은 열대식물인 후추 계피 정향 육두구를 이르러 ‘4대 향신료’라고 한다. 후추와 계피는 지금도 흔하지만 정향과 육두구는 우리에게 다소 낯설다. 정향은 향신료 중 유일하게 꽃봉오리에서 얻는데 꽃봉오리의 생김새가 한자 ‘丁(정)’자를 연상시켜 붙여진 이름이다. 치약이 없던 시절에 주로 구취 제거, 치통 완화, 감기약 등으로 쓰였다. 육두구는 20m까지 자라는 육두구나무 열매의 씨앗이다. 영어로 ‘nutmeg’는 ‘사향냄새가 나는 호두’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위장을 보호하고 설사를 멈추게 하는 효과가 있어 중국에서는 BC 2000년께부터 쓰였다.4대 향신료는 원산지와 주된 수요처 간 거리가 멀었기에

  • 역사 기타

    산업혁명 이전의 가장 빠른 '탈 것'은 말이었다

    BC 344년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에게 그리스 테살리아의 말 장수가 말을 팔러 왔다. 하지만 말이 너무 사납고 거칠어 용맹한 장군들조차 다루지 못했다. 필리포스 2세가 말을 사지 않겠다고 하는데, 열두 살짜리 어린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나섰다. 알렉산드로스는 흥분한 말을 부드럽게 달래더니 가볍게 올라타고 달렸다. 그는 말이 자기 그림자에 놀라 겁먹은 것을 알고, 그림자를 보지 못하게끔 말머리를 태양 쪽으로 돌린 것이었다. 이에 감탄한 필리포스 2세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네게 맞는 왕국을 찾아라. 마케도니아는 너를 만족시키기에 너무 좁다.”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나오는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명마 부케팔로스에 얽힌 이야기다. 명장은 명마와 더불어 탄생한다. 대제국을 건설하고 33세에 요절한 알렉산드로스대왕(BC 356~BC 323)이 그렇다. 이탈리아 폼페이 유적에는 알렉산드로스가 부케팔로스를 타고 있는 그림이 있다. 당시 화폐에 부케팔로스가 새겨지기도 했다.서양에 부케팔로스가 있다면 동양에는 적토마가 있다. 나관중의 장편 역사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여포와 관우가 탔던,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준마다. 주인으로 모신 관우가 죽자 적토는 스스로 풀과 물을 끊고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인류와 말이 맺은 6000년 인연말은 라틴어로 ‘에쿠스’라고 부른다. BC 1만3000년께 프랑스 라스코동굴 벽화에 온전한 야생마가 그려졌을 만큼 인류와 말의 관계는 오래됐다. 말이 가축화된 것은 신석기시대인 BC 4000년께 우크라이나 지방에서다. 개가 BC 1만 년에, 돼지가 BC 8000년에, 소가 BC 6000년에 가축화된 것에 비하면 말은 가축화가 매우 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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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항해시대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넘어서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시절, 지중해 사람들이 ‘세상의 끝’으로 여겼던 곳이 있다. 지중해 서쪽 끝 지브롤터해협에 있는 일명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다.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지브롤터해협의 고대 명칭이다. 두 기둥은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유럽의 이베리아반도 사이 좁은 해협의 남과 북에 솟은 바위산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쪽 기둥은 이베리아반도 남단의 영국령 지브롤터에 속해 있는 해발 425m의 지브롤터 바위산이다. 그러나 남쪽 기둥은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지 남겨진 기록이 없다.그리스신화에서 묘사하듯이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곧 세상의 끝으로 여겨졌다. 배를 저어 더 나아갔다가는 세상 끝의 어둠과 지옥으로 추락한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고대의 진입금지 경고판인 셈이다.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헤라클레스의 기둥 너머에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가 있다고 한 것이 대서양(Atlantic Ocean)이라는 이름의 유래다. 단테도 《신곡: 지옥 편》에서 “인간이 더 이상 넘어가지 못하도록 헤라클레스가 경계선을 표시해둔 좁다란 해협…”이라고 언급했다.이렇듯 고대인의 세계관은 헤라클레스의 기둥 안쪽, 즉 지중해에 국한됐다. 이는 지리적 제한일 뿐 아니라 생각의 한계를 규정하는 경계선이기도 했다. 누구도 그 너머 미지의 공포에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지브롤터해협을 넘어간 사람들이 연 대항해시대모두가 헤라클레스의 기둥 너머 세상을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다. 진취적인 해양민족인 페니키아(카르타고)인은 서부 지중해를 누비면서 헤라클레스의 기둥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대서양에 면한 포르투갈, 모로코 해안까지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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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반 교역은 고위험·고수익 벤처사업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양쪽 끝에는 두 개의 거대한 진나라가 있었다. 진시황이 통일한 중국의 진나라와 중국인들이 대진국으로 불렀던 로마제국이다. 대진국은 ‘서쪽의 커다란 진나라’를 가리켰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와 지중해의 패자가 된 로마는 서로 상대방이 뛰어난 문물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사막, 산맥, 협곡, 강, 초원 등 건널 수 없는 지리적 장벽과 호전적인 유목 민족들이 가로막고 있었다.중앙아시아의 방대한 자연 장애물을 넘어 1만㎞ 이상을 걸어서 그 길을 오간 사람들이 바로 카라반이다. 카라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낙타다. 낙타는 등에 혹이 하나인 더운 사막지대의 단봉낙타와 혹이 둘인 아시아 초원지대의 쌍봉낙타가 있다. 단봉낙타는 안장과 같은 하우다를 얹어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실었고, 쌍봉낙타는 짐 싣는 데 주로 이용됐다. 낙타 한 마리가 100~200㎏의 짐을 싣고 하루에 50~60㎞를 갔다.낙타가 가축화된 것은 BC 2500년께다. 인간이 사막지대로 진출하면서 낙타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낙타는 온순하고 수명이 길어 30~40년은 산다. 긴 눈썹과 코 근육으로 눈과 코를 막아 사막의 모래바람을 견딜 수 있다. 또 물과 먹이가 없어도 혹에 저장된 지방을 분해해 오래 버틸 수 있다. 사막에 최적화된 낙타는 카라반에게 컨테이너 트럭과도 같았다. 그러나 낙타로 운반할 수 있는 물품은 한정됐다. 낙타 100마리에 짐을 가득 실어도 비잔티움시대의 배 한 척이 실을 수 있는 짐의 10분의 1도 안 됐다. 카라반의 영화도 15세기 말 대항해시대가 열린 이후에는 자연히 사라졌다. 근대에 들어서자 교역로 곳곳이 두절돼 잊힌 길이 됐다. 점은 선이 되고 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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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 대륙봉쇄령 세계 경제를 바꿨다

    유럽 열강들은 식민지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1756년부터 1763년까지 7년 전쟁을 벌였다. 유럽 국가 간의 1차 세계대전이라고 할 이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인도, 북아메리카 등의 식민지를 잃었다. 그 후유증으로 1789년 프랑스혁명이 터졌고, 뒤이어 혁명전쟁과 이탈리아 원정이 전개됐다. 이런 혼란기에 나폴레옹이 1799년 11월 9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나폴레옹은 혁명 에너지를 나라 밖으로 돌렸다. 나폴레옹은 개병제에 따라 징집된 150만 대군, 빠른 기동력, 알프스를 넘는 변화무쌍한 전술에 힘입어 파죽지세로 유럽을 장악해 나갔다. 이것이 2차 유럽 대전인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이다. 강한 군대도 먹어야 싸울 수 있다19세기 초에도 군대의 이동 수단은 말 또는 행군이었다. 2000년 전 로마 군대와 다를 게 없었다. 나폴레옹 군대는 주력이 보병이었기에 기동력을 유지하려면 병사의 개인 장비를 줄이고 강행군하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보급도 뒤따라야 하는데, 원정 거리가 길어질수록 보급도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전투는 총과 대포로 금방 결판이 나더라도 전쟁은 속전속결이 불가능했다.나폴레옹도 이미 이런 문제를 인식해 병참 조직을 체계화하고 병사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 그는 상금을 걸고 음식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공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병사에게 지급된 빵은 베개로 쓸 만큼 딱딱했고, 고기 야채 등은 바로 먹을 수 없었다. 이것저것 다 넣고 끓여야 그나마 먹을 만했는데, 그럴수록 행군 속도는 느려졌다. 결국 현지 조달로 방향을 틀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식량 조달이 쉬운 지역과 어려운 지역에서 전과가 달랐던 이유다.파죽지세이던 나폴레옹이 몰락한 러시아 원정이 그런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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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역면제세는 왜 중세에 활성화됐을까

    영어에서 프리랜서(freelancer)는 특정 집단이나 기업에 소속되지 않은 자유 직업인을 총칭한다. 우리말로 프리랜서라고 쓰지만 영어로는 ‘프리랜스(freelance) 작가’ ‘프리랜스 배우’처럼 쓰는 게 일반적이다. 프리랜서는 고용주가 누구든 상관없이 맡겨진 일을 하고, 그 대가를 받는다. 일이 있는 곳을 찾아 여기저기 옮겨 다니므로 정해진 직장이 없고, 일이 없으면 보수도 없다.현대의 프리랜서는 자유 계약직이지만, 그 어원에는 흥미롭게도 중세 역사가 녹아 있다. 프리랜서는 ‘free’와 ‘lancer’의 합성어다. 랜서는 ‘랜스(lance)를 쓰는 사람’, 즉 중세의 용병을 가리킨다. 랜스는 로마제국 후기에 군대에서 사용한 짧은 투창인 ‘랑케아(lancea)’가 어원이다. 중세 기사들이 마상 시합 때 손에 들고서 마주보고 달리며 일합을 겨룰 때 쓰는 게 랜스다. 그러나 정작 중세 때는 프리랜서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19세기 초 영국 작가 월터 스콧이 쓴 소설 《아이반호》에서 중세 용병들을 ‘프리랜스’로 지칭한 것이 시초다. 이 소설에서 사자왕 리처드의 귀환에 동요하는 존 왕의 한 가신이 소집한 용병들을 프리랜스라고 부르며 “그 창은 어떤 주군에게도 헌신을 맹세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 그 유래다. 기사는 소년 시절부터 기사에게 필요한 무예 학문 예의범절 등을 익혀 실력이 쌓이면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말과 갑옷은 워낙 비싸 아무나 갖출 수 있는 장비가 아니었다. 주로 귀족의 자제들이 기사가 됐지만, 말과 장비를 유지할 경제력이 없으면 빚에 쪼들렸다. 이 때문에 용병 모집은 고급 백수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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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무상복지 정책은 왜 실패했을까

    리들리 스콧 감독이 2000년 제작한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등장하는 로마제국의 17대 코모두스 황제는 실존 인물이고, 막시무스 장군은 실제 인물을 토대로 한 가공 인물이다. 코모두스는 오현제(五賢帝)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로, 부친이 황제일 때 태어나 다음 황제가 된 최초 인물이다. 그전까지는 주로 조카, 양자, 부하 등이 황위를 이었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을 쓴 스토아학파(금욕주의)의 철학자이기도 해서 ‘철인황제’란 별칭을 얻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코모두스는 야만적이고 잔혹한 황제로 로마 역사에 기록되었다. 코모두스는 어려서부터 공부보다 검투와 격투기에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그는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쓴 헤라클레스로 분장하고 검투사로 나서기도 했다. ‘빵과 서커스’라는 번영의 역설지중해 최강국인 로마제국은 왜 급전직하로 추락했을까? 어리석고 힘만 센 황제 한 명이 천년 제국을 망칠 수 있을까?로마가 급성장한 전반기에는 검약과 강건함,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똘똘 뭉친 나라였다. 로마는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바다로 진출하던 BC 8세기에 이탈리아반도 중부의 작은 도시 국가로 뒤늦게 출발했지만, 카르타고와 세 차례나 포에니전쟁을 치르며 집정관과 귀족 자제 등이 수십 명이나 전사할 정도로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당연시된 나라였다.하지만 안정기에 접어들자 로마는 ‘번영의 역설’에 직면했다. 번영의 끝은 곧 쇠퇴의 시작이었다. 본래 로마인은 소식을 했지만, 점점 과식과 폭식을 즐겼다. 또 검투사들의 잔혹한 싸움에 열광했다. 곳곳에 들어선 공중목욕탕, 폼페이유적에서 발견된 홍등가도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영국에서 시작된 자동차 산업이 미국과 독일에서 발전한 까닭은?

    1834년 영국 귀족 존 스콧 러셀이 만든 증기자동차가 승객 21명을 태우고 글래스고를 출발했다. 그런데 언덕을 오르기 위해 증기기관의 압력을 높이다 차가 전복되면서 엔진 보일러가 폭발했다. 기관의 불을 조절하던 화부와 승객 2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주행 중 일어난 사고는 아니지만 세계 최초로 기록된 자동차 사망 사고다. 사망자가 발생했으니 증기자동차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들끓는 것은 당연했다. 증기자동차는 괴물로 간주돼 규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19세기에 세계는 이미 증기기관 시대로 접어들었다.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철도와 자동차가 등장하며 가축을 이용하던 시대에서 기계의 시대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증기자동차는 사람들에게 낯설고 흉물스럽게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굉음과 매연을 내뿜는 데다 그을음으로 빨래를 시커멓게 만들기 일쑤였다.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아 ‘달리는 괴물’에 대한 시민 거부감은 점점 커졌다.가장 강하게 반발한 집단은 당시 대중교통을 담당했던 마차업계였다. 증기자동차는 마차 속도의 두 배인 시속 30~40㎞에 달했다. 최대 탑승 인원도 28명으로 마차의 두 배였지만, 요금은 마차의 반값이었다. 말과 달리 ‘지치지 않는 기계’에 승객을 빼앗긴 마부들은 일자리를 걱정했다. 마차 업주들과 마부조합은 증기자동차를 규제하라며 영국 의회에 끊임없이 청원을 넣었다. 말과 사람이 놀라 위험하다는 게 명분이었다. 증기자동차의 경쟁자인 철도업계도 손님을 잃게 되자 청원에 동참했다. “제발, 저 괴물을 멈춰 달라!” 사람보다 빨리 달리면 안 되는 증기자동차정치인은 예나 지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