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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효종과 서인들의 실천 의지에 의구심 생기는 북벌론 국론 통일에는 효과적 수단…추후 나선정벌로 연결돼

    효종의 ‘북벌론’은 비록 꿈이었을지라도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이성계는 1388년 음력 5월 하순, 압록강가에서 말머리를 돌렸다. 그가 탄 말의 눈빛과 꼬리짓, 울음소리는 어땠을까. 이후 이종무가 1419년 잠시 대마도에 발을 디뎠고, 세종 때 김종서와 최윤덕은 멀리서 그림자만 봤을 뿐이다. 이후 조선은 ‘남정북벌’을 꿈꾼 적은 없다. 한정된 인식과 무능함, 현실에 안주하는 습성 때문이었다.남한산성에서 청나라군에 포위된 채 울음을 터뜨린 인조는 포로로 끌려가 8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를 냉대하고 그의 가족을 멸한 뒤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훗날 효종)을 세자로 삼았다. 효종은 즉위 후 ‘북벌론’을 정책기조로 삼고, 실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들과 추진했다. 왕을 방어하는 어영청군을 강화해 수도에 상주시켰고,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수어청군도 재정비했다. 기병전에 대비해 중앙군을 중심으로 기병을 재편했고, 신병기들을 제조했다. 북벌론의 실상효종의 ‘북벌론’을 몇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자.첫째, 효종을 비롯한 서인 일파들은 정말로 실천할 의지가 있었을까.함께 포로생활을 겪었지만 소현세자는 조선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고, 백성의 삶을 위해 청을 학습하는 방식을 택했다. 반면 효종은 원한과 복수심으로 대결하는 방식을 택했다. 서인은 국력과 국제관계의 실상을 외면했고, 전쟁의 참상과 백성의 희생을 가볍게 여긴 죄로 역사와 백성에 책임져야 할 자들이다. 그런데 반청정책과 자주성의 표방은 피해의식과 복수심, 자주라는 감성을 이용해 정책적인 과오를 반전시키고 면피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와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재야의 거두이자 권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