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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버스토리

    포용과 거부 사이, 골 깊은 '난민 딜레마'

    지난 8월 아프가니스탄 난민 377명이 우리나라 공군기를 타고 한국에 왔습니다. 이들은 현지에서 한국 외교관을 도운 사람과 가족들입니다. 우리 정부는 이들을 난민으로 보고 ‘특별 체류 허가’를 내줬습니다.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원에서 생활 중입니다.3년 전인 2018년에도 난민 561명이 한꺼번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예멘 국적이던 이들은 무비자국인 말레이시아를 거쳐 제주로 입국한 직후 한꺼번에 난민 신청을 했습니다. 제주는 말레이시아처럼 무비자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죠. 이 바람에 제주 출입국관리소가 발칵 뒤집혔고, 국내 여론은 찬반으로 갈렸습니다.난민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는 아프간, 예멘뿐만 아니라 시리아와 아프리카, 남미 일부 국가에서 발생하는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해왔습니다. 국제법상 난민은 정치적 박해, 전쟁, 테러, 빈곤, 기근, 자연재해를 피해 다른 나라로 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들은 자국 정부의 보호를 원치 않기 때문에 국경을 넘는 것이죠. 자기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새로운 기회, 새로운 삶을 자국 안에서 찾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지금도 하루에 수만 명이 지중해를 건너고 수천㎞를 걸어서 난민 길에 오르고 있습니다. 난민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터키, 그리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이집트는 세계 여러 나라가 난민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해줄 것을 호소합니다. 난민을 무한정 받을 수 없다는 현실적 고민이 이들 나라를 괴롭힙니다. 1951년 국제사회는 유엔난민협약을 만들었고, 우리나라도 1991년 이 국제법을 비준했습니다. 하지만 난민 문제는 단칼에 해결하기 쉽지 않은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탐라, 유구국 등 아시아 남방지역과 활발한 교류…당나라 거주 신라인들의 경유지 역할 했을 수도

    해양 소국 탐라(耽羅)는 고대 국가들의 흥망성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탐라는 고구려와도 연관을 맺었다. 《위서(魏書)》에는 문자왕 때 북위에 파견된 사신이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珂·진주라는 설)는 섭라(제주도)에서 생산됐는데, ‘가’는 백제가 점령해 못 보낸다”고 변명하는 내용이 있다. 또 제주의 삼성신화(三姓神話)를 수록한 《영주지(瀛洲志)》에는 시원신화를 소개하면서 삼성혈에서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솟았다고 했는데, 비슷한 이야기가 실린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에는 고씨가 고구려에서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주도와 고구려는 경제적인 교류는 물론 주민들 이동도 가능했을 것이다. 신라에 항복…801년 이후 국가 관련 기록 없어탐라는 신라와는 비교적 늦게 관계를 맺었다. 《영주지》에는 고을나의 15대 손인 고(高)씨 3형제가 신라에 입조해 왕에게 작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662년에 탐라국주가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에도 신라와 교섭을 벌였지만, 801년을 끝으로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장보고를 비롯해 당나라에 거주했던 ‘재당 신라인’들은 일본을 오고갈 때 제주도를 경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키나와와 교류해 주목탐라는 일본 열도와도 교섭이 활발했다. 《영주지》에 따르면 3성혈에서 나온 ‘고·양·부’ 3인과 결혼한 삼신녀는 일본으로 알려진 동해 벽랑국에서 왔다. 661년 5월에는 왕자인 아파기 등이 왜국에 공물을 바쳤고, 665년부터 693년까지 빈번하게 사신단을 파견했다. 또 저장성 해안을 출항한 4차 일본 견당선이 표류 끝에 일부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탐라, 대륙과 해양 연결하는 물류망 거점 역할

    우리 역사에서 신비롭고 역동적이며 국제적인 나라가 있었다. 독특한 가치를 지녔던 해양 소국 탐라(耽羅)다. 고려 후기 삼별초 세력이 최후의 항전을 펼쳤으며, 뒤따라 들어온 몽골인들이 말을 사육하면서 속지로 삼았다. 바다를 소외시킨 조선에서는 유배지로 사용되면서 기피의 땅이 됐다. 현대에 들어와 발생한 비극들은 아직 치유가 덜 됐다.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지 않더라도 해륙적인 관점에서 제주도는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동아지중해 해륙교통망의 인터체인지에 있다. 몽골과 북만주, 랴오둥반도, 산둥반도에서 육지와 해안, 짧은 서해를 이용해 한반도에 닿은 후, 추자군도를 중간에 두고 100㎞ 정도 건너면 상륙할 수 있다. 중국의 저장성, 푸젠성에서 해류와 서풍계열의 바람을 이용하고, 또 동남아시아에서는 흑조(구로시오)에 올라타고, 봄철에 부는 남서계절풍을 이용해 오키나와를 거쳐 동북상하면 제주도에 닿는다. 물론 고려나 조선시대의 표류 기록들에 나타나듯 반대의 현상도 있었다. 中·日·삼한과 활발하게 무역제주도에서 대마도(쓰시마섬)까지는 대략 255㎞로 멀지만, 항해 조건은 좋은 편이다. 북부의 사고 마을에 보존된 ‘오카리부네’는 제주도의 ‘테우’와 같은 종류의 뗏목이다(정공흔 설). 규슈 서쪽의 고토열도는 근대에도 뗏목을 타고 오갔을 정도로 밀접했다. 2003년 대포항을 출항한 뗏목 장보고호는 폭풍 속에서 표류했는데도 13일 만에 나루시마에 안착했다. 해발 1995m인 한라산은 시인거리가 약 160여㎞이므로, 원양 항해하는 선박들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 동서 73㎞, 남북 41㎞에 면적이 1845㎢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거주하면서 교류하기에 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