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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형마트 영업제한 10년…유통은 어떻게 진화했나?

    2012년 3월 시행된 대형마트 영업 제한(월 2회 휴업 의무화) 규제. 벌써 10년이 됐군요.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을 살리기 위해 대형마트의 영업시간을 제한한다는 유통산업발전법은 과연 전통시장과 골목 상점들을 발전시켰을까요? 아니면 한창 커가던 대형마트의 성장판만 닫아버린 것일까요?요즘 대형마트들은 울상입니다. 전통시장에 치이고 쿠팡·배달의민족 같은 모바일 쇼핑에 눌리고 있기 때문인데요. 대형마트들은 새로 매장을 내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존 매장도 닫으려고 합니다. 10년 사이에 소비와 유통 트렌드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중심으로 확 변해버렸습니다.영업 제한보다 2년 더 일찍 도입된 출점 제한 조치도 우습게 되긴 마찬가지입니다. ‘유발법’은 2010년 역시 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해 시장 반경 1㎞ 안에 3000㎡ 이상 크기의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SSM)이 새로 들어서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제 질문을 해볼 때입니다. 온갖 종류의 모바일 쇼핑이 유통 시장을 휩쓸고 있는 시대에 이런 규제가 필요한 것일까요? 같은 논리라면 소비 비중의 50%를 넘어선 모바일 쇼핑을 규제해야 하지 않을까요? ‘유통 진화사, 물물교환에서 쿠팡까지’를 공부해봅시다.고기완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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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통이 없는 세상, 상상해보셨습니까

    유통은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다리가 막히면 차가 못 다니듯이, 유통이 막히면 재화와 서비스가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를 잘 오가지 못합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도 따지고 보면 로마로 흘러들어가는 물류와 정보의 유통이 ‘끝내준다’는 의미일 겁니다.유통은 여러 단계를 거쳐 그 모습을 바꿔 왔습니다. 농업이 생겨나기 전에 유통은 아마도 당사자끼리 직접 만나서 물물교환하는 방식이었을 겁니다. 물고기 한 마리와 사과 두 개를 서로 맞바꾸는 방식이죠. 유통은 가장 단순한 단계였을 겁니다. 그다음 누군가 등짐에 물건을 제법 넣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유통했을 겁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보부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두산그룹이 보부상(고 박승직 창업자)에서 시작한 그룹이란 거 아세요?시장이 곳곳에 자생적으로 생겼을 겁니다. 재래시장, 5일장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의 유통은 조금 더 달라졌습니다. 동네에 상회, 상점, 가게들이 생겼고, 종로에 화신백화점이 생겨났습니다.경부고속도로가 1970년 생기면서 유통은 혁명을 맞습니다. 서울과 부산이 연결됐고, 천지 사방으로 도로가 뚫리기 시작했습니다. 유통망 확충은 이곳에서 나는 농산물을 저곳으로, 저곳의 농산물과 제품을 이곳으로 빠르게 옮겼습니다. 생산과 소비가 전국 규모로 이어지면서 생활이 풍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유통은 대형 할인점, 대형마트로 진화했습니다. 지금은 온라인, 모바일 유통시대가 됐습니다. 출근 지하철에서 모바일 쇼핑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안방에서도 척척 합니다. 유통 진화와 휴대폰의 진화는 비슷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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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전행랑·백화점에서 옴니채널까지…유통산업 끝없는 진화

    우리는 고려시대까지도 화폐가 제대로 쓰이지 않을 정도로 유통산업의 발전이 더뎠다. 조선시대에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해서 상업을 낮게 평가했다. 국내 유통산업이 2019년 기준 134조1132억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7.9%를 차지하며 전체 취업자의 14%를 고용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짧은 기간 선진 제도의 도입과 혁신을 거듭한 덕분이다. 상설시장에서 복합쇼핑몰까지우리나라에 상설시장이 생긴 것은 조선 개국 때로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숭례문(남대문) 주변에 ‘시전행랑(市廛行廊)’을 설치하면서부터다. ‘팔지 않는 물건이 없다’는 남대문시장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육의전으로 대표되는 시전상인에게만 물건을 팔 수 있는 권리(금난전권)를 부여하는 등 유통을 억제하는 정책을 썼다. 18세기 후반 정조 때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면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허용되고 1897년 남대문시장이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으로 거듭났지만, 여전히 5일장과 보부상이 전국의 유통을 담당했다.쌀장사와 종이 수입으로 큰돈을 번 박흥식이 1931년 서울 공평동에 세운 화신백화점은 한국 첫 백화점으로 일제시대 일본 상인들이 장악한 국내 유통산업에서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켰다. 박흥식은 화신연쇄점을 모집해 전국에 350개의 가맹점을 두는 등 프랜차이즈 사업을 도입한 인물로도 평가된다. 연쇄점은 같은 종류의 상품을 파는 점포를 여러 지역에 개설해 유통비용을 낮춘 사업모델이다.슈퍼마켓은 1970년대 초 서울 한남동에 개점한 한남슈퍼가 첫 출발이다. 옷 식품 잡화 등 한 품목만 취급하는 동네 가게와 달리 다양한 상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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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통개혁 부르짖은 박제가…"길이 없으니 물자교환 안돼"

    박제가, 유통혁명을 부르짖다일찌감치 유통과 물류의 중요성을 알아본 조선시대 학자가 있었어요. 그 사람의 이름은 박제가(朴齊家·1750~1805)입니다. 조선 영조·정조 시대 때 활약했던 실학파(혹은 북학파) 학자 중 한 명입니다. 박제가는 유통이 개선되어야 조선의 나랏살림이 그나마 나아진다고 봤습니다. 그가 정조에게 올린 ‘북학의(北學議)’를 보면, 그가 얼마나 조선의 유통과 물류의 개혁을 갈구했는지를 알 수 있어요. 한 대목을 읽어볼까요?“영동 지방에는 꿀은 생산되나 소금이 없고, 평안도 관서 지방에는 철은 생산되나 감귤이 없다. 산골에는 팥이 흔하고, 해변에는 창명젓과 메기가 흔하다. 영남지방에는 좋은 종이가 나오고, 보은에는 대추가 많고, 한강 입구 강화에는 감이 많은데…백성들은 이런 물자를 서로 풍족하게 교환하여 쓰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동서로 1000리, 남북으로 3000리로 작은데 물가가 고르지 않다…물자를 교환할 도로와 수레가 없기 때문이다.” 도로와 수레가 없으니 물자가 교환되지 않는다오늘날 경제용어로 말하면, 이렇다 할 유통망과 물류망이 없으니까 각 지방에서 나는 농산물과 특화물이 서로 거래되지 않고, 결국 모두가 곤궁하게 산다는 박제가의 절규입니다. 조선시대에 ‘배달의민족’이 있었으면, 각 지방이 도로로 잘 연결돼 있었다면, 물품들을 실은 수레(지금의 자동차)가 쌩쌩 달릴 수만 있었다면…. 박제가는 조선의 도로와 수레 사정이 당대 선진국인 청나라보다 훨씬 못한 것에 절망했습니다. 그래서 개혁방안을 정조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올렸던 것입니다. 물론 박제가의 개혁안은 정조의 우유부단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