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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해양환경·전선·정보력 활용한 전략·전술 천재…다른 민족에게 자랑할 수 있는 역사와 신화 남겨

    이순신은 군인으로서 남다른 삶의 방식과 특별한 용기를 가졌다. 칠천량 전투로 조선 수군은 거의 사라졌고, 임금조차 수군을 해체한 뒤 충청도로 와서 훗날을 도모하라고 특별히 전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장계에 이렇게 올렸다. “신에게는 전선이 아직 12척 있습니다. 전선은 비록 부족하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니 감히 저를 업신여길 수 없습니다.” 기가 질린 부하들이 주저하자 홀로 적진에 뛰어들었고, 결국 명량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군 133척을 격파했다.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수군으로 근무한 적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짧은 기간의 수군 만호에서 파직된 이후에는 두만강 하구인 함경도의 조산보에서 만호로 근무했다. 1592년 4월 12일 거북선을 건조했는데, 다음날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그리고 5월 7일 첫 전투인 옥포 해전부터 승리를 이어갔다.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작전을 구사한, 전략과 전술의 천재였다. 해양환경과 전선 그리고 전술의 미묘한 상관성을 정확히 파악했다. 조선의 판옥선은 1555년 을묘왜란을 겪고 왜선에 대응할 목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연안용이자 방어용이며, 소나무 등의 침엽수를 이용했다. 길이가 보통 15m에서 20m에 달해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의 함포를 장착해서 먼 거리에서도 쏠 수 있다. 승선 인원은 100여 명이고, 다수의 노꾼을 가동해 속력을 낼 수 있어 신속한 전투에 편리했다. 반면에 일본의 ‘안택선’ ‘관선’ 등은 원양용인 데다 선체가 삼나무여서 내구성이 약했다. 따라서 크고 단단한 판옥선이나 거북선으로 충돌 작전을 펼 수 있었다. 거기에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정보력을 바탕으로 가능한 한 수적으로 우수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20여회 해전 승리로 패망 위기 극복·동아시아 질서 변화

    “싸움이 급하다.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20여 번의 해전에서 무패했고, 아군은 100여 명의 전사자만 낸 이순신 장군이 전사 직전 한 말이다.육지전에서 끊임없이 패하던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5월 초 이순신 장군의 첫 승전인 거제도의 옥포 대첩이 있었다. 같은 해 5월 말에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한 사천 전투에서 적의 배 79척을 침몰시키고 이순신 장군은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8월 14일에는 한산도 대첩이 있었고, 9월 1일에는 부산포 등 남해 동부 해안을 급습해서 대승했다. 이어 1593년과 1594년 계속 승리를 이어나갔다. 1597년에는 감옥에서 나와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하고, 9월 16일에는 명량에서 13척으로 133척과 싸워 대승했다. 이후 몇 번 더 승리했고, 1598년 11월 19일에는 7년 전쟁의 마지막인 노량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전사했다.패전 국면이라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 더구나 대규모 해양전에서 어떻게 이 같은 무패의 대승을 이룰 수 있었을까.이순신 장군의 승전들은 동아시아 질서와 한민족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선 전쟁의 향방에 큰 전기를 마련했다. 첫 전투인 옥포 해전에서 승리한 5월 7일 한양은 이미 점령당했고, 탈출한 선조는 평양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승전보로 백성들과 왕조는 절망에서 희망을, 패배에서 승리를 기약할 수 있었다. 한산도 대첩은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해 일본은 수군은 물론 육군과의 협동 작전이 불가능해졌다. 이에 곡창인 호남은 보호됐고, 일본군은 군량미 보급 등의 차질로 전선에 이상이 생겼다. 아울러 의병 활동이 본격화됐다. 부산포 전투에서는 일본군의 첫 상륙지이자 교두보를 공격해 100여 척을 침몰시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