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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백제 부흥운동서 패한 유민들 대마도에 방어기지 구축

    한반도에서 대마도에 가장 먼저 진출한 세력은 김해에 기반을 둔 구야한국 등 가야연맹들이다. 17세기에 편찬된 《대주신사지(對州神社志)》에는 옛 이야기가 있다. “…먼 옛날 시다루의 해변에 큰 항아리가 흘러 왔는데,… ‘나는 가라로부터 왔으니 가라국이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다’라고 했다. 항아리를 뒷산에 안치했더니, 만조 때는 물이 찼고, 간조 때는 물이 빠졌다….” 이는 가야인들의 항해 과정과 연관이 깊다고 추정된다. 실제로 만의 안쪽인 이 마을에서는 가야계인 스에키 토기의 파편이 많이 발견됐다. 신라 건국 초기부터 대마도 왜인의 침공 잦아대마도는 신라와도 관련이 깊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건국한 초기부터 침입한 왜인들의 기사가 자주 나타난다. 주로 남풍이 부는 4~5월경에 침입한 이들 가운데 대마도의 왜인들이 많았다.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가 대마도를 출항해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대마도에는 신공황후와 연관된 전설과 물건들을 숭배하는 신사(神社)들이 있다. 반면 《삼국사기》에 따르면 408년 왜병들이 대마도에 군대와 무기, 식량 등 군수물자를 쌓아놓고 침공하려 하자 신라는 대마도를 정벌하는 계획을 세웠다.나는 1982년 겨울 밤, 사고마을의 덴신다쿠쓰다마 신사에서 벌어지는 ‘오이리마세’라는 의례에 참여한 적이 있다. ‘천도(天道)신앙’이라는 고대 신앙을 남긴 이곳을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죄인이 신당에 들어가면 감히 잡지 못한다(罪人 走入神堂 卽亦不敢追捕)’라고 기록했다. 마한에 있던 소도신앙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윤명철 《일본기행》, 1989년) 애증의 한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일본 대마국과 해양·무역권 다퉜던 우산국…신라, 우산국 확보 힘입어 북진정책 '성공'

    신라가 우산국을 복속시킬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전해주는 이야기도 있다. 우산국은 작지만 바다에서는 힘이 셌고, 우해왕은 기운이 장사였다. 대마도의 왜구들이 우산국을 노략질하자 우해왕은 수군으로 원정을 감행했다. 겁먹은 대마국왕은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셋째 딸인 풍미녀를 바쳤다. 우해왕은 왕비로 삼은 풍미녀의 변덕과 사치를 위해 신라까지 노략질했으며, 정치를 게을리했다. 심지어는 신라가 공격한다는 정보를 보고한 신하까지 바다에 처넣었다. 섬사람들은 풍미녀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근심에 빠졌다. 결국 몇 해 뒤 우산국은 망하고 말았다(《울릉문화》).비록 설화지만, 우산국이 단순한 어민들의 거주지가 아니라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동해의 해양소국임을 알려준다. 그뿐만 아니라 해상권과 무역권을 놓고 동해와 남해에서 대마국과 충돌한 상황도 추측하게 한다. 실제로 그 무렵인 544년에는 연해주 해안에 살던 숙신인(여진 계통)들이 봄과 여름에 사도섬(니가타현)에서 어업을 했고, 이후에도 대화 없이 물건들을 교환하는 ‘침묵교역’도 벌였다(《일본서기》). 동해에서도 원양항해가 활발했던 것이다. 해양전략적 가치 큰 요충지그 뒤 신라는 동해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했고, 진흥왕은 북진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만큼 우산국은 해양전략적인 가치가 컸다. 항복한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지만 해양문화의 메커니즘과 국제환경을 고려한다면 정치적인 힘은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도 섬의 북쪽과 남쪽에는 6세기 중엽부터 만든 100여 기의 돌무덤이 남아 있다. 경상도의 영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