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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동아지중해 누빈 '아시아의 바이킹' 발해, 오호츠크해부터 대마도까지…무역강국 과시

    발해는 고구려에서 물려받은 기술력 및 만주 일대와 연해주라는 지경학적 환경을 활용해 특수한 산업을 발전시켰다. 풍부한 철을 가공해 농기구와 무기 등을 대량 생산했다. 원조선(고조선)·부여·고구려처럼 모피 가공을 주요 산업으로 발전시켜 왕실과 수령의 부를 확장시키는 수출품으로 활용했다. 또 강(江)어업도 중요한 사업이었다. 발해 또한 지역적인 특성상 목축업이 발달했다. 본격적인 무역 국가로 성장한 발해는 당나라에 무역을 겸한 사신단을 132차례나 파견했고, 투르크(돌궐)와도 교역했다. 일본과 정치·군사 교류에서 경제교류로 전환8세기의 발해와 일본은 신라를 남북에서 압박하기 위한 정치·군사 교류에 비중을 뒀으나 9세기에 가까워지면서 냉전 시대가 끝나고, 무역의 시대로 바뀌며 발해·일 관계도 경제교류가 주목적으로 전환됐다. 발해는 일본에 공식 사절단을 34차례나 파견했다.발해 상단은 담비·호랑이·표범·말·곰 같은 짐승 가죽 등 양질의 모피, 꿀·인삼·산삼 등 토산품, 철·동 같은 광물, 명주·해표피·해상어 등으로 만든 수공업 제품, 다시마 같은 수산물과 함께 대모배(동남아시아산 붉은 바다거북 껍질로 만든 술잔) 등을 수출했고, 면·명주·수은 등과 돈을 받아갔다. 871년에 온 사신단에 일본 정부가 지급한 대금은 무려 40만전(錢)이나 됐다. 자연스럽게 발해악(樂) 등 각종 문화가 일본에 전파됐고, 정치적인 영향력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심각한 무역 역조를 개선할 목적으로 발해 사신단 활동을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9세기 초에는 사신이 입국하는 횟수를 12년마다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일본 대마국과 해양·무역권 다퉜던 우산국…신라, 우산국 확보 힘입어 북진정책 '성공'

    신라가 우산국을 복속시킬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전해주는 이야기도 있다. 우산국은 작지만 바다에서는 힘이 셌고, 우해왕은 기운이 장사였다. 대마도의 왜구들이 우산국을 노략질하자 우해왕은 수군으로 원정을 감행했다. 겁먹은 대마국왕은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셋째 딸인 풍미녀를 바쳤다. 우해왕은 왕비로 삼은 풍미녀의 변덕과 사치를 위해 신라까지 노략질했으며, 정치를 게을리했다. 심지어는 신라가 공격한다는 정보를 보고한 신하까지 바다에 처넣었다. 섬사람들은 풍미녀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근심에 빠졌다. 결국 몇 해 뒤 우산국은 망하고 말았다(《울릉문화》).비록 설화지만, 우산국이 단순한 어민들의 거주지가 아니라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동해의 해양소국임을 알려준다. 그뿐만 아니라 해상권과 무역권을 놓고 동해와 남해에서 대마국과 충돌한 상황도 추측하게 한다. 실제로 그 무렵인 544년에는 연해주 해안에 살던 숙신인(여진 계통)들이 봄과 여름에 사도섬(니가타현)에서 어업을 했고, 이후에도 대화 없이 물건들을 교환하는 ‘침묵교역’도 벌였다(《일본서기》). 동해에서도 원양항해가 활발했던 것이다. 해양전략적 가치 큰 요충지그 뒤 신라는 동해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했고, 진흥왕은 북진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만큼 우산국은 해양전략적인 가치가 컸다. 항복한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지만 해양문화의 메커니즘과 국제환경을 고려한다면 정치적인 힘은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도 섬의 북쪽과 남쪽에는 6세기 중엽부터 만든 100여 기의 돌무덤이 남아 있다. 경상도의 영향을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우산국, 일본 가는 동해 항로 '항해 물표' 역할…고구려·신라, 5세기부터 전략적 가치 선점 나서

    우리 역사에는 육지의 나라만 있지는 않았다. ‘해중지(海中地)’, 즉 물의 나라, 섬의 나라도 있다. 사료에는 동해의 우산국, 남해의 탐라국과 대마국, 서해의 대석삭국(강화도)과 소석삭국(교동도)만 나온다. 하지만 랴오둥반도의 동남쪽 아래인 장산군도, 경기만 바깥의 백령도를 비롯한 연평군도, 덕적군도, 또 흑산군도에도 소국들이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동해 유일의 섬, 울릉도해가 처음 떠오르는 동해는 남북 길이가 1700㎞, 동서 최대 너비는 1000여㎞, 면적은 107만㎢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타타르 해협’까지 포함한 것이다. 이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하나뿐인 섬이 72.6㎢ 면적의 울릉도다. 1032년 ‘우산국주’가 아니라 ‘우릉성주’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우산국(于山國)이었지만, 이후에는 무릉(武陵), 우릉(羽陵), 우릉도(芋陵島 또는 于陵島, 羽陵島), 우릉성(羽陵城), 독섬 등으로 불렸다. 울릉도에서 88㎞ 떨어진 독도는 ‘새끼섬’이다. 생산활동의 중요한 영역이고 피항하거나 항로를 관측하는 데 절대적인 생활공동체다. 《만기요람》 《증보문헌비고》 등도 ‘울릉(鬱陵) 우산(于山)은 모두 우산국의 땅이다’라고 하나의 역사적 영토로 규정했다.육지에서 울릉도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울진에서 159㎞, 강릉에서 178㎞, 삼척에서 161㎞, 포항에서 217㎞다. 《삼국유사》에는 ‘하슬라주(지금의 강릉)의 바다에서 바람을 타고 2일 정도 가면 우릉도(于陵島)가 있는데, 주변이 2만6730보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선사시대 유적도 발굴돼하지만 선사시대에도 사람들은 동해를 건넜다. 섬 안에서 기원전 300년께의 무문토기들이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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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랴오둥반도·일본열도에서 발굴한 석기시대 유물 한반도에서도 발견…벼농사도 해양활동으로 전파

    신석기 때부터 해양교류 활발제주도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고산리 유적은 바다를 건너온 초기 신석기인들이 만든 문화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본래 육지로 연결돼 있었는데,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빙하가 녹으면서 수면이 150m 이상 상승했다. 대한해협과 대마도 같은 섬들이 이때 생겨났다. 7000년 전쯤에는 인간들이 이 섬들을 징검다리처럼 이용해 오갔다. 부산의 동삼동과 조도의 패총, 울산 서생포 등에서는 일본열도계의 토기와 전략물자인 흑요석 제품들이 발견됐다. 반대로 대마도와 규슈 일부 지역에서는 우리 계통의 토기와 돌제품들이 발견됐다.2004년엔 경남 창녕군 비봉리에서 소나무로 만들어진 길이 3m, 폭 60㎝ 정도의 쪽배유물이 발견됐다. 놀랍게도 약 8000년 전의 것이었다. 그런 쪽배나 뗏목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다닌 것이다. 동해도 마찬가지였다. 두만강 하구의 서포항 유적지에서는 고래뼈로 만든 노가 발견됐는데 약 5000년 전의 것이다. 울산의 반구대에는 신석기 시대 말 또는 청동기시대 초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있다. 여기엔 수십 마리의 고래 등 어류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부산 동삼동의 신석기 초기 패총에선 상어뼈와 고래뼈가 발견됐다. 선사시대에 동해 전체와 심지어는 남해에서도 포경업이 매우 발달했다는 증거들이다.산둥반도와 랴오둥반도 사이에는 좁은 발해만이 있다. 에게해와 넓이가 비슷한 소지중해다. 징검다리 같은 묘도군도 등 몇몇 섬에선 약 6000~7000년 전의 해양 관련 유물들이 발견됐다. 일부에서는 그 일대에 5000년 전에 해운업이 있었다는 주장들을 한다.해로로 전래된 벼농사역사시대에 들어오면서 바다는 더 많이 활용됐다. 고인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