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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기원전 3세기 한민족 이주로 '한민족 체제'였던 대마국

    고대에 우리 민족사의 영역에는 복잡한 성격의 해양소국이 있었다. 대마국이다.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대마도는 누구의 영토였는가?” “누구의 역사였는가?” 한·일 관계는 시작할 때부터 복잡했고, 역사가 진행될수록 숙명적으로 변했다. 그 한가운데에서 상대방의 심장을 겨누는 ‘단도(短刀)’(K. W. J. Mekel 주장), 연결하는 ‘다리’라는 상반된 역할을 한 곳이 대마도다. 부산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대마도대마도는 남북이 72㎞, 동서가 16㎞, 면적이 714㎢인 비스듬히 누운 고구마꼴이다. 제주도의 3분의 2, 거제도의 2배, 울릉도의 10배에 달하는 큰 섬이다. 부산에서 약 53㎞, 거제도에서는 80여㎞ 거리로 날씨가 맑으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대마도에서 이키섬까지 약 53㎞, 다시 규슈까지는 20여㎞다. 따라서 대마도를 징검다리처럼 이용하면 장거리 항해가 가능하다. 1노트 내외로 북동진하는 대한난류(쓰시마해류)와 낙조(썰물)의 영향으로 유속은 3노트 이상이 된다. 거기다가 계절풍까지 활용한다면 상호 간 교류는 어렵지 않다. 나는 1983년 8월 ‘해모수’라는 뗏목을 만들어 거제도를 출항했는데, 대마도 북쪽 사고(佐護)까지 불과 44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광의의 ‘한민족 체제’에 속해대마도의 고시다카(越高) 유적지에서는 약 6500년 전의 융기문 토기들이 발견됐다. 가토(加藤) 해상유적지에서도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됐다. 한편 부산의 동삼동 패총, 울산 서생포 등에서는 죠오몽 토기와 흑요석제 도구들이 나왔고, 근래 여수의 안도 패총에선 규슈산 흑요석이 발견됐다. 이렇게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대마도를 중간기지로 삼아 수천 년 동안 자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가야의 한반도 동남부와 일본 서쪽지역 지배…대한해협 사이에 두고 원격통치한 것으로 봐야

    5세기 들어 동아지중해에서는 항로 확보 등을 둘러싼 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 등 해양력 경쟁체제가 만들어졌다. 국가들의 역학관계에도 질적인 변화가 생겼다. 가야 세력들은 남해항로의 독점권을 빼앗기고 무역의 이익이 분산되면서 그 위상이 약해졌다. 해양국가인 데다 연맹체제를 벗어나지 못해 효율적인 관리와 조직적인 통제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결국 가야의 핵심 세력은 이 한계들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일본 열도로 더욱 진출했다. 남은 세력들 가운데 낙동강 중류의 수로망을 장악한 대가야와 남강·남해안의 항구를 가진 아라가야는 고령의 지산동 32호, 44호분과 함안의 말이산 34호분에서 기마용 장비들이 출토된 것처럼 제철문화를 발전시켰고, 일본 열도와 교류했다. 가야, 양안 국가 체제 선택이런 복잡한 시대 상황과 왜와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이론들이 몇 가지 있다. 임나일본부설(일제강점기 일본학설), 기마민족 정복국가설(에가미 나미오), 부여계 기마인들의 진출설(존 코벨), 일본 열도 내 삼한 분국설(북한의 김석형), 백제 진출설(신채호, 문정창), 전남의 전방후원분으로 인한 새로운 설들이 있다(박천수). 소위 ‘기마민족설’은 4세기 초 한반도 남부의 기마민족이 북규슈로 이동한 후 임나까지 포함해 ‘왜·한 연합왕국’을 형성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왕이 북규슈에 본거지를 두었고,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작전권을 주도한다는 논리이므로 ‘임나일본부설’의 변형이라는 한계가 있다.(천관우)또 하나가 양안 국가설(윤명철 《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 1996년)이다. 나는 1994년에 배로 지중해와 흑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우수한 철제무기로 3~4세기 일본 진출한 가야…고구려·백제·신라 등과 4국 해양 경쟁시대 열어

    한 집단의 내부 분열이 심해지면 붕괴로 끝날 수 있지만, 간혹 회복될 수도 있다. 반면 외부 충격(침략)을 받으면 멸망에 이르기 쉽고, 재활하기 힘들다. 가야는 두 가지 요소가 다 작동했기 때문에 4국 가운데 가장 먼저 역사에서 사라졌다. 백성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일본 야마토 지역까지 진출가야는 농업과 수로망이 발달한 낙동강 유역과 어업 생산력이 좋으며 무역에 적합한 남해안을 터전 삼아 12개 이상의 소국으로 출발했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왕국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며, 해양 무역을 활용해 일찍부터 일본 열도로 진출했다. 부산 대성동에 있는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말의 가야 목곽묘들에서는 철제갑옷과 투구, 마구류, 가죽방패 등이 나왔다. 2호분에서는 대형 철덩이 150점, 철칼 등이 발견돼 기마문화가 존재했고 무역이 활발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파형(바람개비) 청동기물, 통형 청동기물 같은 일본제로 알려진 유물도 출토돼 혼란을 일으켰지만, 제작 시기와 수준을 고려해 가야가 원류라는 주장(김태식)이 있다. 설사 일본제라고 해도 상호 교류하는 해양의 메커니즘 속에서는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우수한 철제무기로 무장한 가야인들은 함선을 거느리고 대한해협을 계속 건넜다. 4세기 무렵에는 관서지방인 야마토 지역까지 진출했다. 일본 열도에서는 4세기부터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벼농사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이용해 경제력이 급상승하고, 제철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구도 증가했다. 무엇보다도 지배자의 성격을 반영하는 큰 규모의 전방후원분들이 만들어졌는데, 부장품들은 주로 가야와 연관됐다. 4국의 일본 열도 진출과 해양 경쟁5세기에 들어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