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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요서지역서 두각을 나타낸 고구려 유민 출신 이정기, 당 혼란기에 산둥반도 장악…제나라 건국으로 이어져

    사래 긴 논밭을 일구며 식구들과 소박하게 살아가는 삶이 있는가 하면, 격동과 해일, 절망과 환희, 죽음과 죽임을 오가는 역사의 삶도 있다. 고구려를 부활시킨 대조영, 고선지, 그리고 망각된 이정기 같은 삶 말이다.781년 뜨거운 여름날 그는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지척에 두고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고구려 유민들을 주력으로 산둥지역을 지배하고, 영역을 넓히면서 오랫동안 숨기고 준비해 온 유민들의 한과 희망을 폭발시키려는 순간이었다. 당나라 정부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 순간, 그는 악성종양으로 49세의 나이에 급서했다. 아들인 이납은 제나라를 선포했고, 멸망할 때까지 무려 55년 동안 고구려인들의 나라는 번영을 누렸다. 이정기의 탄생과 국제질서의 변화고구려는 70년 동안의 긴 전쟁에서 패배했고, 복국전쟁까지 실패했다. 유민들은 산둥성, 장쑤성, 심지어는 간쑤성, 칭하이성, 쓰촨성까지 끌려갔고, 남은 일부는 요하를 사이에 둔 벌판에서 고달픈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발해의 수륙군이 732년에 당나라를 공격해서 대승했고, 바로 그 해에 이회옥(이정기)이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구려의 역사와 발해인들의 존재를 알았고, 10대 후반에는 ‘고선지’라는 인물이 파미르를 통과하고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거둔 탄구령 전투와 751년에 ‘탈라스’에서 벌어진 동서문명의 대결전에서 대패했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그때 고선지와 그 병사들이 자기와 같은 핏줄임을 안 청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이렇게 성장한 그가 역사적인 인물로 등장하고, 또 다른 고구려를 부활시키는데 기회를 마련한 것은 국제환경이었다. 당나라는 통념처럼 안정되고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구려 영토와 부여의 풍속 계승한 '황제국' 발해…중국·일본 옛 기록도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 서술

    나라가 망해 포로가 돼서도 굴복하지 않은 채 30년 동안 기회를 노리다가 복국(復國)의 희망을 안고 대탈출을 감행한 발해인들. 2000여 리(里·800여㎞) 길에 겪은 고생도 그렇지만, 그 마음과 꿈을 떠올리면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2002년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東北工程: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을 추진하면서 고구려를 중국 역사로 변조하고, 발해를 말갈인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은 모든 박물관, 전시관, 역사책, 교과서에서 ‘발해’를 지웠으며, 때때로 ‘발해도독부(都督府)’라고 서술한다. 첫 국호는 ‘고려’로 추정발해는 우리의 역사인가? 중국의 역사인가? 발해의 고구려 정통성과 한민족 계열성은 국호와 주민들 성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727년에 2대 무왕은 유민들의 상황을 살펴보고, 국교를 수립할 목적으로 일본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하이(아이누족) 땅에 표착한 24명 가운데 수령인 고제덕 등 8명만 생존했다. 갖고 간 국서(國書)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3대 문왕이 보낸 국서에도 ‘고(구)려의 왕 대흠무가 말한다…’고 썼다. 일본 또한 ‘발해는 옛날 고구려다’고 기록했으며(《속일본기》), 발해에 파견한 사신을 ‘고려사’라고 불렀다. 초기에 파견한 사신단에는 유민으로 정착한 ‘고려씨’들이 포함됐고, 당시 목간이나 그릇, 파편 등에는 ‘고려’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중국과 신라 기록에는 ‘진(振·震)’ ‘발해’ ‘북국’ 등의 용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