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구려의 계속된 영토 확장은 '원조선 회복 전쟁'…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했다

    ‘원조선 회복’ 나선 고구려<삼국유사>는 왕력 편에 ‘주몽은 단군의 아들(朱蒙…鄒蒙 壇君之子)’이라고 기술했고, <수서>를 비롯한 여러 책에도 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라는 글이 있다. <삼국사기>에도 247년조에 ‘평양은 본래 선인인 왕검이 있었던 곳(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이라고 적어 원조선이 고구려와 특별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는 또 주몽이 벌인 정복사업들을 기록하면서 ‘다물려어위복구토(多勿麗語謂復舊土)’라고 평가했다. ‘다물’은 고구려 말인데, 옛 땅(구토)을 수복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옛 질서와 체제를 회복한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건국 당시부터 원조선의 질서를 회복하고 옛 영토를 수복하는 일을 일종의 국시로 삼은 것이다.끊임없이 진행한 정복전쟁고구려는 초기부터 백두산 주변에 있는 행인국, 동해북부와 연해주에 걸쳐 있는 북옥저 등을 정복했다. 뒤를 이은 임금들도 양맥·개마·구다·동옥저·갈사·조나·주나 등 크고 작은 소국을 병합했다. 대체로 백두산 지역, 압록강 남쪽 지역, 동해안 일대, 연해주 일대, 그리고 중만주의 부여 영토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한편 대외전쟁을 펼쳐 2대 유리왕 때부터 북쪽의 선비족을 공격하고, 한나라가 남겨둔 잔존 세력들을 몰아냈다. 5대 모본왕은 서기 49년에 요동지방과 요서지방을 지나 현재의 베이징 근처와 그 이북인 북평·어양·상곡·태원 등을 공격했다. 뒤이어 6대 태조대왕은 요서지방에 10성을 쌓아 관리지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대 광개토태왕은 22년간 재위하며 우리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한민족 초창기 만주부터 일본까지 문화공동체 형성…개방·포용·다양성 발전시켜 세계로 나아가야

    이상 지향과 강한 자의식우리에겐 ‘이상(理想)’을 지향하는 순수한 성격이 남달리 강했다. 우리가 살아온 동쪽의 끝(Far East)은 해가 떠오르고 문화의 씨앗이 움트는 터였다. 해는 빙하기 이후에 인간의 생존과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고 햇빛은 밝음과 지혜를 상징했다. 그래서 이집트인, 인도인, 마야인, 투르크인들처럼 인류는 해를 숭배했지만 우리처럼 집요하게 추구하고 하늘을 숭모해온 민족은 드물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신라 등의 나라 이름, 심지어 ‘한국’까지도 해와 밝음을 의미한다. 부여와 고구려의 초기 왕들은 태양을 의미하는 ‘해(解)’씨였다. 백제의 동명(東明)도, 신라의 박혁거세도 ‘밝음’을 뜻한다. 백두산, 태백산, 부여 같은 지명들도 해와 관련이 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백제의 동명제 같은 의례는 하늘을 모시는 제천행사다. 하늘의 자손(天孫), 해와 달의 자식(日月之子), 천제(天帝)임을 자처했으니 항상 자의식이 강했다. 지나칠 때는 오만과 거드름으로 변성(變性)돼서 안타깝지만 말이다.다양성과 개방성우리 민족성은 한때는 교조적이고 쇄국적이었지만, 원래는 활달하고 개방적이며 다양성이 풍부했다. 문화와 혈연, 언어, 신앙, 설화 등은 유라시아의 전 지역과 연결됐다. 이 때문에 다른 외모와 말을 존중했고 다른 문화와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수용했다. 더욱이 발전기에는 만주 일대와 한반도, 해양, 심지어 일본 열도의 일부까지 문화공동체였으므로 당연히 개방적일 수밖에 없었다. 무교, 선교(풍류도),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 서구 사상 등 많은 종교와 사상이 들어와 지금까지 큰 차별과 충돌 없이 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