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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당·신라와 전쟁·교류하며 동북아 강국이 된 발해, 요동반도에서 연해주 북부까지 영향력 뻗쳤다

    당나라의 포로가 돼서도 굴복하지 않은 채 30년 동안 기회를 노리다가 2000여 리(里·800여㎞) 대탈출을 감행한 발해인들. 발해는 대부분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됐으며 온돌, 복식, 무덤과 축성 양식을 비롯해 제철 기술, 말 사육과 무역 등의 산업, 매사냥 등의 풍습 등 고구려 문화를 계승했다. 연호를 사용하는 등 스스로 황제국임을 내세우기도 했다. 당나라 공격하며 강국으로 발돋움고왕(대조영)은 700년에 ‘진국’이라는 이름으로 신라에 사신을 파견했으며, 705년에는 당나라와 사신을 교환했다. 우호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는 국제환경 속에서 당나라는 713년에 대조영에게 ‘발해군왕 홀한주도독(渤海郡王 忽汗州都督)’이란 지위를 줬다. 그런데 2대 무왕은 적극적으로 국제질서에 참여해 북으로는 흑수말갈, 서로는 당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732년 9월, 장문휴가 거느린 함대는 압록강 하구인 박작구를 출항했다. 요동반도 남쪽 해양과 묘도군도를 경유해 전광석화처럼 산둥반도 북부에 상륙한 군대는 자사(지방 감찰관)인 위준을 죽이고 등주성을 점령했다. 한편 무왕은 육군을 거느리고 거란의 도움을 받아가며 요서지방을 공격해 승리를 거뒀다. 이때 당나라는 남쪽에서 발해를 공격하도록 신라를 압박했으나, 733년에 출동한 신라는 폭설을 핑계 삼아 도중에 철군했다. 이 승리로 발해는 강국으로 발돋움했으며, 당은 738년 등주에 발해관(渤海館: 발해 사신이 머물던 숙소)을 설치해 발해 사신단 및 승려들의 방문과 무역에 협조했다.발해와 신라는 기본적으로 적대관계였으므로, 신라는 동북 변경에 장성을 쌓았다. 발해가 신라도(新羅道)를 개통했음에도 불구하고 790년과 812년에만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의 성장 막기 위해 일본·중국 남조와 교류하며 성장한 백제

    4세기 말까지 고구려와 백제는 100㎞ 이내의 내륙 공간에서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등장해 백제의 해양기지인 관미성을 점령, 전세가 역전됐다. 태왕은 다시 396년 수륙양면작전을 펼쳐 경기만의 58성, 700여 촌을 함락시키고 한성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해양력이 삼국의 역학관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요서진출설’의 진실은이후 백제는 계속되는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고 동쪽으로는 신라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왜(일본)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었다. 또 양쯔강 하류로 도피한 한족이 세운 송나라, 제나라 등 남조 국가들과 활발하게 교섭을 벌여 국제질서에 진입했다. 반면 선비족이 화북 일대에 세운 북위와 교류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위서>와 <삼국사기>에 실린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이리와 승냥이 같은 것들이 길을 막았으며, (중략) 거친 물결에 배를 띄우고…’라고 기록해 바닷길이 중요했음을 알려준다. 북위도 역시 고구려의 방해가 있었고 바닷길이 험해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지 못했다.그런데 몇몇 사료의 기록을 근거로 이 무렵 백제가 요서지역을 지배했다는 ‘요서 진출설’이 주장됐다. 중국의 <송서>(488년)는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다. (중략) 백제 또한 요서를 침략해 점령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백제가 다스린 지역을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기록했다. <남제서>(6세기 전반)에도 ‘백제군을 두었는데, 고려(고구려)의 동북에 있다’라고 나와 있다. 그 밖에 <양서>와 <남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