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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성주 양만춘의 지도력과 고구려인의 자유의지, 고립무원 상태의 안시성 '승리의 기적' 이끌어냈다

    수를 대체한 당나라는 종주권 회복, 중화중심의 체제 완결이라는 중국적인 숙명도 계승했다. 대운하를 이용해 남북을 하나의 상권과 경제권으로 발전시켰다. 수도인 장안에는 페르시아인, 중앙아시아 상인들이 거주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망을 확장했고, 남쪽에서는 인도, 아라비아까지 해양 실크로드가 활성화됐다. 유라시아 동쪽의 모든 나라와 종족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당나라 편에서 전쟁에 참여하게 됐다. 고·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고구려는 대당(對唐)정책을 놓고 요하전선 중심의 적극적인 대결을 주장하는 연개소문 세력과 해양 방어, 수성전을 선호하는 영류왕 세력으로 나뉘어 권력쟁탈전을 벌였다. 당나라의 총체적인 전력을 분산시키는 외교군사전략을 입체적으로 추진해야 했지만 다 실패로 돌아갔다. 남은 것은 남부에서 백제, 신라를 외교·군사적으로 압력을 가하면서 당과의 연결고리를 끊는 전략이었다.이렇게 광범위한 전선이 형성된 가운데 벌어진 고·당 전쟁은 고·수 전쟁을 계승해 동아시아 종주권을 장악하고, 북방의 유목민족을 포위하는 대응전선을 구축하는 ‘제2차 동아시아 국제대전’이었다. 당나라는 선공을 하면서 해륙 양면작전을 개시했다. 645년 4월 요동성은 주몽사당에 승리를 빌면서 치열하게 항전했지만 바람을 이용한 화공에 버티지 못하고 15일 만에 함락됐다. 당 태종은 남쪽으로 이동해 백암성에서 항복을 받았고, 안시성을 공격했다. 90일간의 안시성 공방안시성은 고립무원 상태에서 90일 동안 공방전을 벌였다. 당나라군은 사정거리 1000m의 기계식 활인 교차노(絞車弩), 이동식 투석기인 포차, 근거리 중형무기인 박간 등으로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