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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요동정벌 4불가론' 앞세워 위화도서 돌아온 이성계, 신진사대부와 결탁해 역성혁명…최영 등 정적 제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고려의 멸망을 재촉한 예기치 않은 사건이었다. 명나라는 건국 초기의 불안했던 정세가 안정되자 고려의 요동 진출 가능성을 우려했다. 실제로 공민왕은 1369년과 1370년 요동 지역의 동녕부를 공격했고, 이때 고구려의 수도권인 환인의 오녀산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또한 남은 북원의 세력을 완전하게 토벌하자 명나라는 요동지역으로 진출할 것을 결정했고, 고려에 1388년 원나라에서 되찾은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요구했다. 위화도 회군과 개혁의 시작고려와 명나라의 위상을 결정짓는 사건을 놓고 정부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요동 지역은 원래 고려의 영토였다는 논리를 펴는 실권자인 최영의 주장대로 요동 정벌이 결정됐다. 이미 두 차례 요동작전을 펼쳤고 당시의 불확실한 국제정세, 추후 명나라와의 관계 등을 고려하면 최영의 판단은 무모하지 않았다.반대파였던 이성계는 5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발해 음력 5월 7일 위화도(威化島)에 도착했다. 하지만 물의 범람을 핑계로 14일 동안 도하를 미루다가 ‘4불가론’을 내세웠다. 그 가운데 첫째가 이후 조선의 정책과 사대부들의 인식에 굴레를 씌웠고, 바로 지금껏 우리 뇌리에 박힌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다(以小逆大)’는 문구다. 그는 회군한 지 11일 만에 우왕과 최영을 사로잡고 쿠데타에 성공했다.이성계는 특별한 기반이 없는 변방세력이었지만 출중한 전투능력과 사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신흥군벌로 중앙정계에 진입했다.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아버지와 함께 참전해 공을 세웠다. 1361년 10만 명의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할 당시 개경 탈환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원나라의 침략 이후 '쇠락의 길' 접어든 고려…관직에 등용된 신진사대부, 새 세상 꾀하는데

    고려는 1231년 원나라 공격을 받은 후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걸었다. 문명이건 민족이건 붕괴를 시작한 집단은 혼란을 겪다 결국 ‘극복’ 아니면 ‘멸망’을 맞는다.자연재해나 외적의 침입, 전쟁 패배로 인한 붕괴는 백성의 엄청난 희생을 동반한다. 반면 내부에서 발생한 지배계급의 권력 교체나 쿠데타로 인한 붕괴는 백성의 실질적인 희생이 적다. 원나라 공격 후 서서히 붕괴된 고려고려는 150여 년간 서서히 붕괴했다. 그동안 원치 않은 국제전에 동원됐고, 부마국으로 독립성을 인정받았지만 영토 일부를 탈취당했다. 정동행성을 통해 정치를 간섭당하며 멸망의 길을 걸었다. 약 80년 동안 재위한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등의 충(忠)은 원나라에 대한 충성을 의미한다. 그들은 몽골의 피가 섞였고, 원나라에서 교육받았고, 공주와 결혼해 황제의 사위가 된 후 귀국해 왕이 됐다.이들은 세계 제국인 원나라 궁전에서 국제 정치를 학습하고, 우수한 문명을 체험했지만, 고려에 대한 정체성이 부족했다. 그뿐 아니라 현실을 몰라 정치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필연적으로 원나라와 연결된 환관, 역관, 투항한 군인 등 친원파와 공존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심지어는 쿠빌라이칸의 사위인 충선왕을 티베트로 귀양 보냈을 정도의 권력을 가진 환관도 있었다.매년 150명의 처녀를 공녀로 원나라에 바치면서 고려에서는 조혼 풍습이 생길 정도였다. 이때 공녀로 끌려가 토구훈 테무르(혜종)의 비가 된 기황후의 일족도 대표적인 친원파였다. 이들은 건국 이후 존재한 문벌 귀족, 무신정권의 잔재, 고급 관료와 합쳐 권문세족을 이뤄 정부의 요직을 독점했다.또 토지를 탈

  • 테샛 공부합시다

    개방을 통해 나라는 경제적 부를 축적하죠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온 송나라 사신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 따르면 “개경엔 화려한 저택과 외국인 전용 숙소도 많다. 여성은 물론 남성도 비단으로 자신을 꾸미고 다녔다. 기름·종이·말·돼지 시장이 각각 있을 정도로 상업이 발달했다”고 서술했습니다. 송나라 사람이 본 고려는 말 그대로 경제가 부강한 나라였습니다. 고려가 이렇게 풍족한 생활을 누렸던 요인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개방의 나라 고려고려는 건국부터 바다와 가까운 나라였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세력 기반이 바로 바다였습니다. 왕건은 해양세력을 바탕으로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 통일도 이룰 수 있었죠. 이후 고려는 개경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벽란도’라는 무역항을 통해 다양한 나라와 교역을 했습니다. 송나라부터 요·금·원나라, 왜국 그리고 저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고려에 들어오면서 개경과 벽란도 주변은 상업 활동이 활발했죠. 고려는 외국인을 관료로 등용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려 광종 때 중국 후주 사람 ‘쌍기’입니다. 고려는 다양한 문물과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사회였습니다. 반면, 조선은 바다에 대한 활동을 금지하는 ‘해금정책’을 펼쳤습니다. 공무역 외의 사무역은 철저하게 규제했죠. 교역의 문을 닫은 조선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고, 결국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나라를 잃게 되죠. 고려와 한국의 대표적인 수출품은?고려시대 아라비아 상인을 통해 ‘코레아’, ‘꼬레아’라는 이름으로 서양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현재 한국의 ‘코리아’가 고려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40년간 600회 가량 왜구의 침략 이어져…고려, 대마도 정벌에 나서지만 결국 멸망

    통일국가 고려가 멸망하기까지 왜구의 침략은 큰 역할을 했다. 몽골과 원나라에 시달린 고려는 말기 40여 년간 왜구에게 무려 591회에 달하는 침략을 받았고 결국 멸망했다. 왜구의 침략은 이후 조선 시대에도 이어지다 ‘임진왜란’이란 정규군의 공격으로 대체됐다.왜구는 중국 해안과 연해주 일대까지 약탈했지만, 주로 고려에 집중됐다. 왜구의 끝없는 침략과 고려의 대응왜구들은 공민왕 20년 동안에만 100여 회 넘게 침략했으며, 우왕 때는 14년 동안에 378회나 쳐들어왔다. 1350년~1392년까지 40여 년 동안 무려 591회나 침략한 것이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왜노들의 침략으로 나라는 이미 섬의 물고기·소금·목축의 이익을 잃었고, 또 곡식이 나는 기름진 들판을 잃었다”고 토로했다. 또 연해의 수천리 지역에는 인가에서 연기가 끊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정부는 1377년에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려는 논의까지 했다.고려는 뒤늦게 수세적인 태도를 버렸다. 처음에는 공격 대신 회유책을 사용했다. 공민왕은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고, 대마도 만호에게 쌀 1000석을 주고 귀화를 원하는 왜구에게 남해안의 일부 지역을 거주지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래도 왜구는 1374년 4월에 전선 350척을 동원해 합포(마산)로 진입했다. 왜구의 해적선은 대선은 300여 명, 중선은 100명에서 200여 명, 소선은 40~80명 정도가 승선이 가능했다. 이에 비춰 400~500척씩 선단을 구성했으니 마치 전면전 같은 양상이었다. 이때 벌어진 해전에서 고려는 40척이 손실되고, 5000명이 전사하며 패배로 끝났다.고려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이유는 만성적인 식량 부족현상 때문이었다. 왜구들의 거점은 주로 대마도 이끼섬,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몽골 쿠빌라이의 일본 정벌에 합류한 고려…900여척 전함에 1만여명 태우고 마산서 출항

    4대 황제에 오른 쿠빌라이에게 몽골제국이 부여한 최대 과제는 남송의 멸망과 동방의 완전한 정복이었다. 일본열도는 지정학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치가 별로 없었다. 일부의 견해대로 남송을 공격할 때 외교적인 배후 역할 정도였다. 쿠빌라이칸은 1226년 고려에 일본 정벌 의도를 선언하고 협조를 요구했다. 이에 고려는 1268년 6월 쿠빌라이와 고려의 국서를 일본에 전달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일본은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고, 사신을 억류했다.드디어 원정이 결정되고, 고려는 정월 16일에 공사를 시작해 5월 그믐까지 대선과 소선(小船)을 합쳐 900척을 건조했고, 물품도 모두 갖췄다. 변산반도 지역과 나주 천관산 지역의 목재를 활용해 전선 300척, 빠른 공격선 300척, 급수선 300척 등 900척을 불과 4개월 반 만에 완성한 것이다. 고려의 조선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고, 계속된 전쟁에도 국력과 노동력 등이 남아 있음을 알려준다.음력 10월 3일. 원나라의 홀돈(忽敦·쿠둔)과 홍다구가 지휘하는 몽골·한군(蒙·漢軍) 2만5000명과 군사 8000명, 사공(梢工)·수로안내자(引海)·선원(水手) 6700명을 포함한 1만4700명의 고려군이 승선한 전함 900여 척이 마산 합포에서 출항했다. 대한해협을 건너 음력 10월 5일 대마도 남쪽에 상륙해서 고모다 해안(小茂田浜) 전투에서 손쉽게 승리했다. 연합군은 이어 음력 10월 14일 늦은 오후 50여㎞ 떨어진 이끼섬에 상륙하고, 15일에 점령했다.해안에서 평지로 20여㎞ 진군하면 일본의 서경이며 군사사령부인 다자이후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런데 의외로 승리를 목전에 둔 연합군은 돌연 퇴각해서 만 안에 정박시킨 선박으로 귀환했다. 이후 새벽녘에 폭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약탈하고 쓸모있는 사람을 강제이주시켰던 몽골, 역참 설치해 교류…'진정한 세계화의 첫발' 평가

    칭기즈칸이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서아시아의 패자였던 호레즘과의 일전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218년 몽골이 보낸 상단이 오트라르에서 살해되면서 불거진 호레즘과 몽골의 대결은 칭기즈칸 군대의 ‘잔인함’과 군사적 ‘천재성’이 드러난 계기이기도 했다. 특히 호레즘의 심장이었던 부하라 공략은 칭기즈칸의 번뜩이는 기지가 빛난 순간이었다. 칭기즈칸은 사마르칸트를 경유하는 통상의 루트 대신에 현지인 투항자들을 길잡이로 활용해 키질쿰(붉은 모래) 사막을 횡단하는 강수를 뒀다. 1220년 전방전선 650㎞ 뒤에 있던 부하라 성문 앞에 몽골의 대군이 나타나자 부하라시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저항하면 학살 … 전문가는 몽골로 보내몽골군이 출현하자 방위병들은 400명의 투르크 병사만 성채 안에 남겨둔 채 줄행랑을 쳤다. 부하라 시민들은 다음날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의 지도하에 항복했다. 일부 병사는 부하라시 요새를 점거한 채 12일간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몽골군의 공격에 결국 제압됐다. 이후 몽골군이 부하라에 대해 처한 행동은 이후 트랜스옥사니아 지역에서 칭기즈칸 군대에겐 일종의 행동규범이 됐다. 특히 인력, 고상한 표현으로 인적 자원 처리에 있어서 그러했다. 우선 장인들(특히 무기 제조장인과 방적공)처럼 쓸모 있는 사람들은 엄선돼 동쪽의 몽골지역으로 보내졌다. 젊은이들은 몽골군의 다음 전투에서 활용될 ‘화살받이(arrow fodder)’로 잡혀갔다. ‘화살 폭풍(arrow storm)’이라고 불리는 집단 사격으로 적군의 혼을 빼놨던 몽골군은 적군의 공격에 대한 ‘싸고도 유용한’ 그러면서 ‘살아 있는’ 방어수단도 확실하게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200년간 이어진 발해의 나라 되찾기 활동, 후발해국·정안국·을야국·대원국 등 세웠지만…

    10세기 들어와 동북아시아는 국가 간 질서재편으로 소용돌이쳤다. 당나라가 907년에 붕괴되면서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는 대분열 시대가 시작됐고, 910년대에는 9개국이 난립한 상태였다. 토번(티베트)은 서남 지역의 영토를 대거 잠식했고, 몽골 초원에서는 세계사를 바꿀 ‘몽올’ 부족이 성장했으며, 840년에 멸망한 위구르 한(칸)국의 망명인들 또한 혼란을 일으켰다. 남쪽에서는 신라가 1000년의 역사를 마감하는 중이었고, 신흥세력인 후백제와 고려가 긴박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국제질서의 변화를 간파한 야율아보기는 동몽골의 초원지대와 요서에서 거란족을 통일(916년)하고, 서남쪽으로 토욕혼 등을 공격한 후에 몽골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거란은 925년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상경성, 헤이룽장성 닝안현)을 포위한 끝에 큰 전투 없이 4일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주변국 상대로 적극적 외교관계 모색그렇다면 위기에 직면한 발해는 어떤 자구책을 강구했을까? 신흥국인 후량과 후당에 몇 번이나 왕자를 파견했다. 신라 등(‘新羅諸國’)에 구원을 요청하는(《거란국지》) 등 타국과 우호관계를 모색했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왕건의 선조인 호경(虎景)은 백두산에서 내려온 사냥꾼으로서, 성골(聖骨) 장군으로 불렸는데, 이는 발해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왕건은 발해 유민을 환대했는데, 거란을 견제하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방문한 호승(胡僧)을 통해 후진(後晉)의 고조에게 “발해는 우리와 혼인했습니다(渤海我婚姻也)”라고 했다.(《자치통감》) 백두산 화산 폭발은 발해 멸망 후그런데 의문이 든다. 야율아보기는 발

  • 역사 기타

    고려, 몽골이 세운 세계 질서 속에서 민간무역 번성, 新 지식인도 배출…조선을 열 신흥세력 잉태됐죠

    1323년 남방산 향목(香木)과 2만 점 이상의 자기 및 28t의 동전을 싣고 중국 영 파를 떠나 일본으로 가던 200t 규모의 무역선이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했 다. 1976년 우연히 발굴된 이 무역선은 대몽골 울루스의 질서에서 번성했던 동아시아 해상 교역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전남 신안 보물선2만 점 이상의 자기에는 얼마 되지 않지만 고려청자도 포함됐다. 고려 왕실만 그 번성한 동아시아 해상 교역에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민간 상인도 참가했는데, 그들의 몫은 14세기 말까지 점점 커지는 추세였다.14세기 전반 <노걸대(老乞大)>라는 어학 교습서에 의하면 고려 상인들은 모시와 인삼을 말에 싣고 육로로 요동을 거쳐 원의 대도로 갔다. 대도에는 그들의 친척이 있어서 물화를 판매했다. 상인들은 그 대금으로 산동의 제령부로 내려와 비단, 바늘, 화장품, 장신구 등의 고급 물화를 구입해 배편으로 귀환했다. 그들은 관인무역허가장을 지참했는데, 이외에 상인 자격이나 수출입 품목의 종류·수량에 특별한 제약이 있던 것 같지는 않다.14세기 중후반 원명(元明) 교체의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민간 무역은 더욱 번성했다. 주요 수출품은 여전히 모시였다. 권세가들은 그들의 농장에 모시를 재배했으며, 주변 사원으로 수공업자와 노비를 모아 모시 천을 대량 직조했다. 고려 상인에 관한 <박통사(朴通事)>란 기록에 의하면 한꺼번에 1만 필의 모시를 싣고 중국에 입항하는 고려 상선이 있었다. 고려왕조는 상선이 직접 중국으로 출항하는 것을 금했다. 그 금령이 14세기 중후반에 사실상 해제된 상태였다. 민간 무역의 번성으로 대도의 외항인 통주 관내 완평현에 고려장(高麗莊)이란 마을이 생겨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