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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파산선고한 엄마 그리워하는 18세 딸의 분투기

    김설원 작가의 <내게는 홍시뿐이야>는 제12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으로 2020년 3월 발간됐다. 다양한 이유로 해체되는 가정이 늘어나는 세태 속에서 이 소설은 독특하게도 부모의 ‘파산선고’로 가족이 흩어지는 모습을 담았다. <내게는 홍시뿐이야> 속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비정하게 “힘들다. 헤어지자”고 선언한다.열여덟 살 아란은 엄마와 단둘이 살았다. 어느 날, 엄마는 장기 임대아파트의 임대 기간이 끝나가는데 분양금 넣을 돈이 없어 집을 비워야 한다며 또와 아저씨 집에 가서 지내라고 말한다. 또와 부부에게 돈을 좀 빌려줬으니 하숙비 미리 낸 거나 마찬가지라고 참 쉽게도 말하는 엄마에게 아란은 자신이 아르바이트라도 하겠다며 매달린다. 하지만 엄마는 “여기는 일자리가 없다. 내가 대도시로 가서 돈을 벌어 올 테니 당분간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자”고 일축한다.또와아귀찜, 또와막창구이 등 개업하는 가게마다 실패를 거듭한 또와 아저씨네도 형편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그 집에서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또와 아저씨는 어려운 형편을 밝히며 ‘나는 지쳤다. 이제는 숨 쉴 힘도 없다. 각자 어디로든 떠나라’는 선언이 담긴 종이를 두 자녀에게 나눠준다. “앞가림하려면 적어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한다”며 맞아주었던 아저씨의 파산선고에 아란의 선택은 떠나는 것뿐이다.치킨집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다열여덟 살 아란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학교를 그만두고 7000원짜리 찜질방에서 지내며 생활정보지를 통해 살 집과 일자리를 찾아낸다. 23번 버스 종점에 있는 폐허 같은 집에 월세 10만원을 내고 들어갔고, 대학 휴학생이라고

  • 교양 기타

    물메기국 넘어가는 소리에 목이 메던 풍경

    아버지의 빈 밥상고두현정독도서관 회화나무가지 끝에 까치집 하나삼십 년 전에도 그랬지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토담집 까치둥지어머니는 일하러 가고집에 남은 아버지 물메기국 끓이셨지겨우내 몸 말린 메기들 꼬득꼬득 맛 좋지만밍밍한 껍질이 싫어 오물오물 눈치 보다그릇 아래 슬그머니 뱉어 놓곤 했는데잠깐씩 한눈팔 때 감쪽같이 없어졌지얘야 어른 되면 껍질이 더 좋단다맑은 물에 통무 한쪽속 다 비치는 국그릇 헹구며평생 겉돌다 온 메기 껍질처럼몸보다 마음 더 불편했을 아버지나무 아래 둥그렇게 앉은 밥상간간이 숟가락 사이로 먼 바다 소리 왔다 가고늦은 점심, 물메기국 넘어가는 소리에목이 메기도 하던 그런 풍경이 있었네해 질 녘까지 그 모습 지켜봤을까치집 때문인가, 정독도서관 앞길에서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서성이는 여름 한낮.*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그날 정독도서관 앞 회화나무 아래에 한참 서 있었습니다. 수령 300년이 넘은 나무의 짙푸른 녹음과 가지 위에 초가집처럼 얹힌 까치둥지 때문이었을까요.어릴 적 밥상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초등학교 5~6학년 무렵이었지요. 그때 우리 식구는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 토담집에 살았습니다. 집도 절도 없어서 오랫동안 절집에 얹혀살다가 계곡 옆에 작은 흙집을 마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죠.마당 가 평상에 앉아 점심을 먹는데 키 큰 회화나무 가지 위의 까치집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밥상은 대부분 아버지가 차렸지요.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대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희미해서 더욱 간절한 그 시절의 매혹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첫 문장에 매료되어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속으로 빨려들면 오묘한 미로 속에서 수많은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 모호하면서도 매혹적인 장면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위트가 운영하는 흥신소에서 탐정 일을 하는 기 롤랑. 그는 자신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다. 기 롤랑이라는 이름과 신분증명서를 만들어준 위트는 “지금부터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시오”라는 현실적 조언까지 한다. 8년간 함께 일한 위트가 흥신소 문을 닫자 롤랑은 늘 허전한 현재와 기대되지 않는 미래가 아닌 깜깜한 과거로 떠난다.‘흥신소’와 ‘탐정’이 추적을 좁혀가며 과거를 선명하게 복원해 낼 것이라는 기대를 주지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라는 제목처럼 기 롤랑이 떠나는 길은 불확실하기 그지없다.파트릭 모디아노는 1945년 프랑스 불로뉴비양쿠르에서 이탈리아계 유대인 아버지와 벨기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23세에 발표한 첫 소설로 두 개의 상을 받은 그는 이후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평단과 독자들의 열렬한 찬사를 받으며 유명 문학상을 휩쓸었다. 주요 작품으로 <도라 브루더> <신원 미상 여자> <작은 보석> <한밤의 사고> <혈통>을 꼽는데,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현대 프랑스 문학이 거두어들인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슬픈 빌라><청춘시절><8월의 일요일들><잃어버린 대학>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노벨 문학상·공쿠르상·부커상을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는데, 모디아

  • 교양 기타

    진짜 성공이란 바로 이런 것

     성공이란                              랠프 월도 에머슨날마다 많이 웃게나.지혜로운 사람에게 존경받고해맑은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것,정직한 비평가들에게 인정받고거짓된 친구들의 배반을 견뎌내는 것,아름다움의 진가를 발견하고다른 사람의 장점을 알아보는 것,튼튼한 아이를 낳거나한 뼘의 정원을 가꾸거나사회 환경을 개선하거나무엇이든 자신이 태어나기 전보다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들어 놓고 가는 것,자네가 이곳에 살다 간 덕분에단 한 사람의 삶이라도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것이 바로 성공이라네.* 랠프 월도 에머슨 : 미국 시인(1803~1882)2021년 4월 선종하신 정진석 추기경을 떠올리며 ‘옴니버스 옴니아(Omnibus Omnia: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준다)’의 뜻을 다시 새겨봅니다. 정 추기경은 생의 마지막에 장기까지 기증하며 모든 것을 주고 갔습니다.그를 생각하며 또 한 사람의 신부를 떠올립니다. 그는 실화영화 ‘나초 리브레’의 주인공 신부입니다. 1998년 5월 멕시코시티. 프로레슬링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이 한 레슬러의 은퇴식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늘 황금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경기를 해온 그는 이제 53세의 중년이 되었지요.그가 링에 오르자 박수와 환호가 동시에 터졌습니다. 박수가 잦아들 즈음 그는 황금가면을 천천히 벗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사람들은 숨을 죽였지요. 마침내 황금가면을 벗은 그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는 작은 가톨릭교회의 신부 세르지오 구티에레스입니다. 프로레슬링을 하는 동안 저는 보육원 아이들을 경제적으로 도울 수 있었고, 그들에게 꿈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최전방에서 기획해 열정으로 엮은 명강의 28편

    우유곽의 표준어는 우유갑으로, 우유를 담은 작은 상자를 뜻한다. 책 제목을 우유갑으로 쓰지 않은 이유를 알려두기에 ‘엮은이의 요청과 고유명사화된 개념으로 우유곽이라고 표현한다’고 밝혀놓았다. <우유곽 대학을 빌려드립니다>는 2010년에 발행된 책으로, 강의를 수록한 교수진 중에 이미 고인이 된 분도 있다. 그런데도 꾸준히 판매되는 비결은 이 책을 엮은 최영환 하이데어 대표가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면서 강연 때마다 거론하기 때문인 듯하다.이 책에 등장하는 교수, 즉 필진 28인은 한마디로 쟁쟁한 인물들이다. 최 대표가 각 분야 최고를 엄선해 필수공통학부, 실무형인재학부, 릴레이션십학부, 국제적감각학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양학부로 나누고 세부적으로 학과를 분류해 인터뷰 내용을 게재했다. 교양학부 조엘 오스틴(<긍정의 힘> 저자), 세계인재학과 신호범(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 정직학과 윤은수(휠라코리아 대표), 관계학과 안성기(영화배우), 스피치학과 T.J.워커(미디어 트레이닝 월드와이드 CEO), 열정학과 이길여(경원대 총장) 등 교수진이 화려하다. 무명 청년의 용기이 책은 충실한 내용 못지않게 화려 필진을 섭외하는 과정이 유명하다. 이 책을 기획한 최영환 대표는 부산 영도에서 자라 경북 포항에 위치한 한동대학교에서 문화와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장교로 군에 입대했다. 늘 변두리에만 살았던 그는 군대만큼은 중심 지역으로 발령받고 싶었다. 하지만 인터넷은 물론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최전방 비무장지대에 배치됐다. 그는 ‘고립된 환경에서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꿈을 꾸다가 ‘각 분야 전문가를 초빙해 자기 계발을 원하는

  • 교양 기타

    의사 시인을 감동시킨 비누 두 장

    비누 두 장김기준여리디 여린 당신의 허리춤에 긴 마취 침 놓고두려움에 떨고 있는 당신의 눈을 보며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손잡아주며괜찮아요괜찮아요내가 옆에 있잖아요그 순한 눈매에 맺혀 오는 투명한 이슬방울산고의 순간은 이토록 무섭고 외로운데난 그저 초록빛 수술복에 갇힌 마취의사일 뿐일까?사각사각 살을 찢는 무정한 가위소리꼭 잡은 우리 손에 힘 더 들어가고괜찮아요괜찮아요내가 옆에 있잖아요편히 감는 눈동자 속에 언뜻 스쳐 간 엄마의 모습몇 달 후 찾아와서 부끄러운 듯 내어놓은황토빛 비누 두 장고맙습니다고맙습니다우리 아가 먹다 남은 초유로 만든 비누예요그때 손잡아 주시던 때알러지로 고생한다 하셨잖아요혼자 남은 연구실에서 한동안 말을 잊었네기어코 통곡되어 눈물, 콧물 다 쏟았네고맙습니다고맙습니다내가 더 고맙습니다* 김기준 : 1963년 경남 김해 출생. 연세대 의대 졸업. 2016년 ‘월간 시’ 신인상.시집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과 사물에 대하여> 출간.제왕절개 수술 때 산모에게는 진정제를 투여하지 않는다. 배 속의 태아를 위해 척추마취만 한다. 수술 도중 산모의 긴장과 불안은 극에 달한다. 의료진의 다급한 목소리와 수술기구들이 부딪히는 소리, 피부와 살을 찢는 소리를 무방비 상태로 들어야 한다. 산모에게는 한없이 두려운 순간이다.그날도 그랬다. 그는 마취 침을 놓고 난 뒤 불안해하는 산모의 손을 꼭 잡아줬다. “괜찮아요. 내가 옆에 있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해보세요.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수술 침대에 누운 산모가 그의 손을 꾸욱 잡았다. 그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어느 순간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19년 전 발표한 첫 장편소설에 세계가 관심

    천명관 작가의 장편소설 <고래>가 2023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쇼트리스트) 여섯 편에 올랐다. 맨부커상이 부커상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한국 작품이 이 부문 최종후보에 네 번째 선정됐다. 2016년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았으며 이후 한강의 다른 소설 <흰>, 정보라의 소설집 <저주토끼>가 최종후보까지 진출했다.5월 23일 <고래>가 두 번째 수상작이 될지, 관심이 폭증하고 있다.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기만 해도 세계적인 관심 속에서 판권 계약이 줄을 잇는데, 이미 국내외에서 <고래>가 유영하기 시작했다.<고래>는 2004년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으로 천명관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처음으로 쓴 작품이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니 놀라울 따름이다.부커상 심사위원회는 <고래>에 대해 “이런 소설은 없었다. 읽어보길 추천한다. 에너지에 휩쓸린다. 캐릭터는 비현실적이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다. 착한 캐릭터는 아니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며 아래와 같이 부연설명했다. “사악한 유머로 가득 찬 소설, 유머와 무질서로 전통적 스타일을 전복하는 문학 양식인 카니발레스크(Carnivalesque) 동화. 한국의 풍경과 역사를 관통하는 피카레스크(picaresque·악인이 주인공인 소설)식 탐구. 생생한 인물들은 어리석지만 현명하고, 끔찍하지만 사랑스럽다.”이상야릇하면서 독특한 이야기출간 19년 만에 <고래>가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다는 뉴스를 접한 독자들은 부커상 심사위원들의 평에 고개를 끄덕이며 ‘최종후보에 오를 만한 작품을 찾아낸 안목&r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이비인후과 전문의 눈으로 본 훈민정음 제자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과학적인 문자는 한글’이라는 자부심은 ‘손 안의 컴퓨터’ 휴대폰이 보편화되면서 완전히 증명됐다. 배우기 쉬운 문자에서 디지털 시대에 최적화된 문자라는 평가까지 한글에 대한 칭송은 나날이 높아만 간다.문창살을 보고 만들었다는 말도 있었지만, 언어학과 음성학의 대가인 세종대왕이 혀뿌리 모양을 바탕으로 만든 과학적인 문자가 바로 한글이다. 예를 들어 어금니 소리글자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이며, 입술소리 글자 ㅁ은 입 모양을 본뜬 것이다.한글 창제의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이 확인됐음에도 한글 원리에 대한 해석에서 합의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자음 글자는 혀나 입술 같은 발성 기관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건 이해하지만, 모음 글자는 성리학 이론과 관련된 천지인을 가져와서 만들고 조합했다는 것을 두고 학계 의견이 분분하다. 천지인을 명확히 입증한 책<훈민정음 음성학>은 ‘천(·)지(ㅡ)인(ㅣ)이 소리 조음 시 공명강의 특징적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입증한 책이다. 과학적으로 훈민정음을 분석한 책의 내용도 놀랍지만, 저자가 이비인후과 전문의라는 점이 더 놀랍다. 연세대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한 최홍식 작가는 후두질환과 음성 장애·두경부암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EBS ‘명의’에 두 차례 선정됐다. 김대중·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비인후과 자문의를 지내기도 했다.연세대 의대 명예교수와 제일이비인후과의원 대표원장으로 재직 중인 저자는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인 외솔 최현배 선생의 손자다. 그 인연으로 외솔회 이사장에 이어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대표이사를 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