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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286호 2011년 3월 28일

경제사상사

[경제사 뒤집어 읽기] (4) 나일강의 선물 이집트

수에즈 운하는 2500년전 완성됐다

정복자 다리우스 1세가 첫 완공

물의 이용이 이집트의 경제 좌우


기원전 460년에 이집트를 방문한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를 두고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사실 이집트의 역사는 거의 전적으로 나일강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일강의 주요 원류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에티오피아의 아비시니아 고원에서 발원한 청나일(Blue Nile)이며,다른 하나는 아프리카 적도 지방인 부룬디의 한 샘에서 발원해 빅토리아호를 거쳐 흘러오는 백나일(White Nile)이다.

두 원류는 하르툼 북쪽의 누비아 사막에서 합쳐진 후 이집트 국경 안으로 들어온다.

이집트 문명을 지탱하는 귀중한 강물과 토사(土砂)는 이처럼 대부분 국경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다.

매년 여름 나일강의 홍수와 범람은 거의 시계처럼 정확하게 일어난다.

5월이면 북부 수단에서 수위가 상승해 6월에 남부 이집트의 아스완 근처 제1폭포에 도달하고,9월이 되면 나일 유역의 범람원 전체가 검붉고 탁한 물 아래 잠긴다.

이 물이 빠지고 나면 두껍고 냄새가 강한 잔존물이 남아 비옥한 흑토가 된다. 이집트가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식량원이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농부들은 홍수 뒤에 물에 잠긴 땅에 파종하고 나무 쟁기로 흙을 긁어 덮어준 다음 4~5월에 수확한다.

매년 이런 식으로 농사를 짓는 일이 수천년간 지속됐다.

대개 이 같은 관개농업이 장기간 지속되면 염분화 현상(모세관현상에 의해 땅속의 염분이 식물 뿌리에 달라붙었다가 토양에 남아 해당 지역 전체가 불모의 땅이 되는 현상)으로 문명 자체가 멸망하게 되지만 나일강은 경사가 급해 범람 때마다 토양 오염물을 쓸어가 버리기 때문에 이런 일을 피할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이 3000년 동안이나 번성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웃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사방으로 트인 지역에 위치한 까닭에 늘 이민족의 침략을 받아 격변의 연속이었던 것과 대조적으로,고대 이집트 문명은 안정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지정학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이집트의 북쪽과 동쪽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서쪽은 광대한 사막지역이며,북쪽은 험준한 산악지대여서 외부 지역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북동쪽만 지키면 된다.

이런 안정된 여건 속에서 이집트인들은 내세에 더 좋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낙관적인 종교적 믿음 속에서 평화롭게 농사를 지으며 소박한 삶을 살았다.

물론 이집트 역사에서 외적의 침입 혹은 그 반대로 해외 원정이나 무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집트 문명의 흥망성쇠는 놀라울 정도로 나일강 범람의 순환과 일치했다. 범람이 순조로우면 식량 사정이 좋아지고,나일강 유역의 상부 이집트와 하류 삼각주 지역의 하부 이집트 사이에 정치적 통합이 달성되며,화려한 신전과 기념물이 지어진다.

가뭄으로 나일강 수위가 낮아지면 기근과 분열,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상부 이집트와 하부 이집트가 분열되면 지방 군벌들이 일어나고 도적떼가 출몰하며,결국 외적의 침입을 초래하게 된다.

이집트는 '바다 민족(Sea People)'이라 불리는 이방인의 공격을 받았다가 한 세기가 지나서야 겨우 축출한 적도 있고,리비아인,누비아인,아비시니아인의 침공으로 거의 4세기 동안 외국인의 지배를 받은 적도 있다.

이런 위기가 지나고 나면 다시 이집트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해외로 뻗어나갔다.

하트셉수트 여왕 시대가 그런 사례다. 이집트에서 보기 드문 여자 파라오인 하트셉수트는 기원전 1479년에 아문(Amun) 신의 신탁에 영감을 받아 홍해를 넘어 '아프리카의 뿔'이라 불리는 푼트(Punt) 지방(현재의 소말리아 지방)과 해상교역을 시도해 유향과 몰약(종교 의식과 미라의 방부 처리에 사용됐다)과 같은 귀한 상품을 들여왔다.

가장 활발하게 해외 원정과 교역을 시도한 파라오로는 네코 2세(기원전 610~595)를 들 수 있다.

그는 강력한 육군과 해군을 키워 멀리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

그가 시도한 가장 대담한 사업은 역사상 최초로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일이다.

이 운하는 19세기에 만들어진 수에즈 운하와 똑같지는 않아서 나일강 삼각주의 제일 동쪽 끝에 흐르는 한 지류와 홍해를 연결했다.

네코는 두 척의 배가 동시에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넓게 판 운하로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해 양쪽 바다의 함대를 통합 운영하려 했다.

그런데 무려 12만명의 사망자를 내며 거의 완성 직전까지 갔던 이 사업을 돌연 중단했는데,그 이유는 운하가 완성되면 적들이 유리하게 이용하리라는 신탁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사상 수에즈 운하의 건설 작업은 여러 차례 시도됐으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1~486 재위)가 이집트를 정복한 후 드디어 완성돼 이집트와 페르시아 간 항해가 용이해졌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이집트를 지배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마 제국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2세기 초의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초기 이슬람 시대에도 운하가 재개통됐지만 그때마다 침니(沈泥) 현상이 일어나 물길이 다시 막혔다.

그 후에도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려는 계획이 여러 차례 논의되다가 1869년 오늘날의 수에즈 운하가 개통됐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이집트의 역사는 농업용수로나 혹은 수로로 나일강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거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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