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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721호 2021년 9월 6일

경제사 이야기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금속화폐뿐 아니라 지폐도 가치하락 거듭…원나라 지폐 남발은 고려에도 영향 미쳐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은 금속화폐가 등장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리스는 물론 로마시대에도 국가는 금속의 무게와 순도를 조작하는 방법으로 ‘주조차익(시뇨리지)’을 챙겼고, 그럴수록 사람들은 순도가 높은 금·은화를 품안에 간직하느라 시장에 유통되는 것은 모두 순도가 낮은 불량 화폐뿐이었다.
유럽에 널리 퍼진 화폐 ‘개조’
중세시대 각종 ‘범죄행위’ 탓에 화폐가치가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지면, 일차적으로 강한 처벌책과 협박을 동원했다. 1124년 영국의 헨리 1세는 200여 명의 화폐제조 장인을 불러 모은 뒤 100여 명의 오른손을 잘라버렸다. 하지만 가장 널리 쓰인 방법은 화폐가치를 경쟁적으로 더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왕들은 기존의 화폐를 모아 중량과 순도가 다른 새로운 화폐로 찍어냈다. 이 과정에서 화폐 유통량은 과거에 비해 형편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자들의 주조 차익 욕구는 여전했다. 3~5년 간격으로 기존 주화를 회수한 다음 가치가 낮은 새 디자인의 주화로 대체하곤 했다. 14세기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장 2세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생포된 뒤 당시 프랑스 영토 절반에 해당하는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재위 첫해에만 18번, 그 뒤 10년 동안 70번이나 화폐를 개조했다. 1360년 몸값으로 내기 위해 3.87g 무게로 발행한 새 화폐 ‘프랑(franc)’은 이후 프랑스 화폐 단위 프랑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이 같은 화폐가치 하락은 범유럽적 현상이었지만 지역별로 약간씩 수준차가 있기는 했다. P 스퍼퍼드의 계산에 따르면 1300~1500년 무렵 유럽의 화폐가치는 잉글랜드가 1.5%, 아라곤과 베네치아가 1.9%, 보헤미아 2.5%, 한자동맹국 3.9%, 피렌체 3%, 로마 2.8%, 프랑스 3.9%, 오스트리아 5%, 플랑드르 6.1%, 쾰른 16.8%, 카스티야 65% 수준으로 손실을 경험했다.

가치 하락에도 불구하고 주화가 계속 찍힌 원인으로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정부가 화폐 발행을 독점한 이후 군주들은 화폐에 자신의 모습을 새겨서 국민에게 지배자의 위상을 괴시하거나, 화폐 발행에 따른 주조차익을 획득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고 꼬집기도 했다. 게다가 재주조에 따른 비용을 왕실이 부담하지 않은 탓에 혹 순도는 좋아졌을지 몰라도 화폐의 중량은 지속적으로 줄었다. 반복적인 재주조로 영국에선 은화 1파운드가 120페니로 만들어지다가 15세기가 되면 240페니로 주조됐다. 중량이 절반으로 줄었다. 화폐를 쪼개고 자르는 행위도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주화를 8조각으로 절단해 사용하는 관습에서 ‘조각(piece)’을 의미하는 페소라는 통화 단위가 만들어졌다. 해적들은 8분의 1 조각이란 표현으로 페소를 지칭했고, 영어에서 ‘2조각(two bits)’이라는 용어도 25센트를 의미했다.

유럽 사회가 이 같은 악순환에서 벗어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탈리아 상업도시들의 부상 덕이었다. 지중해 무역을 통해 금화를 주조할 만한 양이 축적된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악화 생산에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13세기 중엽 제노바, 피렌체, 베네치아 등에서는 자체적으로 금화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연대기 작가 조반니 빌라니에 따르면 1340년께 피렌체 주조소는 연간 35만~40만 플로린어치의 금화를 찍어냈다. 피렌체에서 주조한 ‘피렌체 금화(피오리노 도로)’인 플로린화는 금화 하나당 순금 54그레인(gr)을 함유했고, 유럽 여러 황제와 왕들에 의해 모방됐다. 네덜란드와 헝가리에서도 통용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최종 승자는 상업 중심지였던 베네치아에서 주조한 두카트 금화였다. 두카트화는 무게와 순도가 정확하게 유지됐기 때문에 국제 결제를 대표하는 통화로 역할을 수행했다. 프랑스 장 2세의 일부 몸값과 잉글랜드 리처드 2세의 부인이었던 프랑스 이사벨의 지참금, 키프로스 자크 1세의 몸값, 곤트의 존이 영국 왕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대가가 모두 두카트화로 지불됐다. 양화(良貨)가 시장의 신뢰를 양분 삼아 유럽 경제의 분위기를 바꿔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동양에선 지폐도 가치하락 반복
그레셤의 법칙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았다. 중세 유럽 사회와 거울처럼 동양 사회에서도 비슷한 통화가치 하락 현상이 반복됐다. 대상이 금속화폐가 아니라 지폐로 바뀌어도 마찬가지 현상이 발생했다. 경제학자 로저 부틀에 따르면 1190년부터 1240년 사이에 중국의 지폐 공급은 6배로 늘었고, 같은 기간 물가는 20배나 뛰었다. 원나라 시대 지폐인 원보초(元寶·交)의 운명은 그런 인플레이션 사례의 압축판이라 할 만하다. 원나라는 은 중심의 경제정책을 썼다. 1260년 쿠빌라이(원 세조) 즉위를 기점으로 은본위 통화인 중통원보초(中統元寶·中統)를 발행하고 일종의 태환 준비금 역할을 할 핵심 물자로 원나라 내부의 은 재고량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하지만 지폐 사용이 늘고, 금속화폐를 제치고 지폐가 주화폐가 되면서 ‘남발’의 유혹을 피하긴 어려웠다. 군사비 등 각종 경비에 지출하기 위해 지폐를 마구 찍어댔고 원보초 가치는 폭락했다. 1287년 지원통행보초(至元統行寶·사진)가 발행되자 화폐가치 하락은 되돌릴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지원초 발행 자체가 중통초의 가치가 하락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명목가치를 이전의 5분의 1로 재조정한 뒤 출범시킨 것이기도 했다.

원보초의 근본적인 문제는 종이에 찍어낸다는 것이었다. 지질 상태에 따라 가치가 쉽게 변하는 약점이 있었는데 정부 차원의 관리는 날이 갈수록 해이해졌다. 원래 원나라는 지질 관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신보초와 구보초를 교환해주는 행정기관으로 ‘행용고(行用庫)’를 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본래 임무가 방기되거나 고가의 환전 수수료가 요구되는 폐단이 발생했다. 환전이 제대로 안되면서 화폐의 가치와 신용에 대한 일반인들의 신뢰는 급격히 약화됐다. 특히 지원초를 대신해 중통원보교초(中統元寶交)를 발행하면서 동전인 지정통보전(至正通寶錢)이 주조돼 함께 유통된 것은 악수 중의 악수였다. 명목통화인 지폐와 현물가치를 내재한 동전이 함께 유통되면서 시중에서 지폐가 추방됐던 것이다. 그 결과 시중 물가가 10배로 뛰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정부가 군량 공급과 포상을 위한 쉬운 선택으로 지폐를 찍어대면서 원보초 가치는 급전직하했고, 시중에선 철저히 버림받았다.

그리고 이 같은 현상은 고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충렬왕부터 충목왕까지 고려 왕들은 원 황제와 황실로부터 다량의 원보초를 하사받아 국왕들의 원나라 방문 비용과 대외무역 등에 사용했다. 하지만 공민왕 대에 이르면 종잇조각이 된 원보초는 쓸 곳이 없어졌다. 결국 이는 군인들의 봉급으로 ‘땡처리’되거나 관료들로부터 마필을 강제 공출하면서 명목상 대가로 주어지는 형태로 악용됐다. 원나라의 화폐 남발 폐해는 이웃 한반도의 고려 지배층과 일반 백성에게까지 직접적인 흔적을 남겼다.
NIE 포인트
① 금속화폐와 달리 지폐는 무게와 순도를 조작할 수 없는데도 통화가치 하락이 반복된 이유는 무엇일까.

② 화폐가 시장의 신뢰를 얻고 가치하락을 겪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③ 비트코인처럼 탈(脫)중앙화를 지향하는 암호화폐는 무게·순도 조작이나 통화남발 등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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