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어원은 2001년에 순화한 용어 '전자상거래'만 쓰도록 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말의 사용을 어느 한쪽으로 통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조만간 e커머스는 한글화해 '이커머스'로 표기가 굳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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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대유행은 우리 사회에 소비행태 변화를 촉발했다. 전통적으로 대형마트 등에서 대면 거래를 하던 소비자들은 이제 비(非)대면 거래에 익숙해져야 한다. 온라인 시장이 확대되면서 필연적으로 떠오른 말이 ‘e커머스’다. 신세계그룹은 지난 6월 3조4000억원을 투입해 이베이코리아를 인수, 네이버쇼핑을 뒤쫓는 e커머스 강자로 발돋움해 주목을 끌었다. 외래어와 다듬은말 ‘언어 시장’에서 경쟁e커머스는 ‘electronic commerce’의 약자다. 온라인상에서 상품과 서비스를 사고파는 것을 말한다. electronic의 머리글자 e만 살리고 commerce는 발음을 그대로 한글로 적었다.

e커머스가 우리말 체계에 등장한 것은 이미 20여 년 전이다. 1990년대 후반께부터 언론에서 ‘전자식 상거래(electronic commerce)’ ‘전자상거래’ ‘E-커머스’ ‘e커머스’ 등의 명칭으로 소개했다. 곧이어 다듬은말이 제시됐다. 국립국어원은 2001년에 순화한 용어 ‘전자상거래’만 쓰도록 했다(국어순화자료집). 하지만 살아 있는 말의 사용을 어느 한쪽으로 통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e커머스와 전자상거래는 여전히 ‘언어의 시장’에서 경합 중이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조만간 e커머스는 한글화해 ‘이커머스’로 표기가 굳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호에서 살핀, 초기의 ‘e메일’이 나중에 ‘이메일’로 자리 잡은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결국 ‘이커머스’와 ‘전자상거래’의 싸움이 될 것이다. 여기에 굳이 ‘순화’의 관점을 덧씌우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유로운 언어 시장에서의 경쟁에 자칫 왜곡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지속돼온 우리말 순화작업은 주로 위에서 아래로 전개된 일방향 운동이었다. 성과도 컸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두 말 간의 관계가 언중의 선택에 의해 자연스레 정리되기를 지켜보는 것도 좋다. 언중의 선택 받지 못하면 소멸화 과정 밟아외래어와 다듬은말 간의 세력 다툼은 좀 거창하게 말하면, 언어순혈주의(민족주의적 관점)와 언어혼혈주의(다문화주의적 관점) 간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종종 언중이 갖고 있는 ‘가치판단의 문제’로 귀결된다. 일상의 언어생활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일이다. 가령 글쓰기에서 ‘글로벌 톱10’이란 표현을 생각해 보자. 이를 ‘세계 상위 10위권’ 정도로 써도 될 것이다. 두 표현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글 쓰는 이가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말 우선주의 관점이라면 당연히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전자를 선호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우리말에서 외래어가 넘쳐나는 현상을 보면 그렇다.

외래어가 들어오면 번역어 또는 순화어가 제시된다. 이때 제시어가 경쟁력이 없으면 그 말은 퇴출의 길을 걷게 된다. 개화기 때 ‘치즈(cheese)’를 뜻하던 ‘소젖메주’(한영자전, 1890년, 당시 표기는 소졋메쥬, 국립국어원 <쉼표,마침표> 2021년 3월호)가 사라진 게 그런 까닭이다. 치즈의 주재료인 우유를 나타내기 위해 ‘소젖’을 쓰고, 그 모양은 메주에 빗대 그럴듯하게 바꿨다. 하지만 언중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립스틱’은 원래 있던 우리말 ‘연지’라는 단어를 사용해 ‘입술연지’라고 했다. 입술연지는 요즘 잘 쓰지 않지만 사전상으로는 남아 있다. 연지란 화장할 때 입술이나 뺨에 찍는 붉은 빛깔 염료를 말한다. 새로운 말로 소개돼 해당 외래어와 함께 ‘언어의 시장’에서 경쟁했으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밀려난 사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