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맬서스《인구론》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자유는 정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며,
정부 자체만으로 보장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토머스 맬서스
(1766~1834)
영국의 경제학·사학자
(전)동인도대 경제학 교수
토머스 맬서스 (1766~1834) 영국의 경제학·사학자 (전)동인도대 경제학 교수
영국 경제학자인 토머스 맬서스(1766~1834)는 1798년 《인구론》을 펴냈다. 산업혁명으로 농촌 사람들이 계속 도시로 몰려들던 때였다. 급팽창한 도시는 혼란스러웠지만,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계몽주의 사상은 산업혁명과 과학 발달에 힘입어 사회가 더 좋아질 것으로 보고 있었다.

맬서스는 사회 주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인구론》을 대표하는 문장인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에서 보듯 미래를 비관적으로 봤다. 토지 자원은 유한한 만큼 식량 증산이 인구 증가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식량 부족이 초래할 빈곤은 자연적 조건에 의한 것이지 사회제도에 의한 것이 아니며, 인위적으로 구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맬서스는 일반 정서와는 다른 주장을 펼치는 데 대한 부담 때문에 《인구론》 초판을 익명으로 낸 뒤 2판부터 실명으로 출판하며 내용을 수정해 나갔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는 《인구론》의 가치를 “문장도 착상도 단순하지만, 여기에는 체계적인 경제학적 사고의 발단이 있고 인용할 만한 부분이 많다”고 했다.

“식량부족 대비해 인구 급증 막아야”

[다시 읽는 명저] 인구급증 따른 빈곤 불가피성 강조하며 미래 비관, 농업생산성 향상 간과…국가 개입주의 한계 지적도
맬서스는 《인구론》 출판에 앞서 미국 정치가이자 과학자인 벤저민 프랭클린으로부터 통계자료를 받아 인구와 식량의 관계를 분석했다. 그의 ‘기하급수적 인구 증가와 산술급수적 식량 증산’ 결론은 그렇게 도출됐다. “25년마다 인구는 1, 2, 4, 8, 16, 32, 64, 128, 256, 512 식으로 증가한다. 식량은 1, 2, 3, 4, 5, 6, 7, 8, 9, 10 식으로 늘어난다. 따라서 225년 뒤에는 인구와 식량의 비율이 512 대 10이 될 것이다.”

《인구론》은 출판되자마자 큰 주목을 받았다. 맬서스가 식량 부족에 대비해 인구 급증을 막아야 한다며 언급한 방법들이 논란을 불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맬서스의 주장은 틀렸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지 않았고, 농업 분야의 생산성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품종 개량과 비료 사용, 농업기계 활용 덕분에 식량 생산은 가파르게 늘었다.

《근본자원》을 쓴 줄리언 사이먼에 따르면 1950년대 미국 농업에서 옥수수와 밀의 생산성은 1800년과 비교할 때 각각 20배와 30배 이상 높아졌다. 경쟁과 혁신이 경제 성장을 이끌며 빈곤은 물론 인구 문제까지도 스스로 해결했다.

맬서스는 친구인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1772~1823)와 여러 경제 사안을 놓고 논쟁을 벌이면서 깊은 통찰력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인구론》을 출판할 무렵 곡물 수입을 제한한 ‘곡물법’ 폐지를 놓고 리카도와 대립했다. 애덤 스미스 뒤를 잇는 고전파 경제학자인 리카도는 당시 곡물법 폐지와 자유무역을 주장했다. 그래야 곡물 가격이 떨어지고 서민 수요가 증가해서 경제에도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면 맬서스는 곡물 수입을 계속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른바 ‘유효수요’를 거론하며 가격이 떨어지더라도 돈이 없는 빈민들은 곡물을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떨어진 곡물 가격이 농장들에 피해를 줄 뿐이라고 지적했다. 맬서스와 리카도의 논쟁은 자유무역 이론을 체계화시킨 계기가 됐다.

맬서스는 정치·사상적으로 후대에 미친 영향이 큰 경제학자로 꼽힌다. 국가 개입주의의 분명한 한계를 지적한 그의 자유주의 사상은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맬서스는 빈민 구제 일변도의 선심성 정책이 인구 증가를 가속화하고 빈곤의 악순환을 가져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도적 차원의 조치들만으로는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영국 정부는 그의 주장에 따라 빈민 보조금을 줄이기도 했다. 좌파로부터 “피도 눈물도 없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그러나 맬서스의 핵심 주장은 가볍지 않다. 그는 “신용 문제에 관하여 또는 처자권속의 장래를 돌보는 문제에 관하여 나태한 자와 근면한 자가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면 오늘날 개인들이 일반적 번영의 원동력인 보다 나아지고자 하는 노력을 할 까닭이 없다”고 지적했다.

자유의 가치 무관심에 경고

또 “우리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 자유를 지키는 일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그저 정부가 대신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고 비합리적인 태도”라고 강조했다. “자유는 정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며, 정부 자체만으로 보장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고도 했다. 국가 간섭주의와 무조건적인 평등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맬서스는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윈은 맬서스의 생존 경쟁론과 인구 과밀론에서 자신이 찾아 헤매던 진화의 추동력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맬서스가 사용한 ‘유효수요’ 개념은 1930년대 세계 대공황 때 나온 케인스의 유효수요이론으로 발전했다.

김수언 한국경제신문 부국장(전 논설위원) so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