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한경 사설 깊이 읽기] 경제 살리려면 규제완화·투자활성화가 추경보다 급하죠
[사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교훈 새겨야 할 재정 확장정책

경기 침체의 그늘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수출마저 7개월째 감소세이고, 제조업·자영업 부진 속에 일자리도 소득도 개선 기미가 안 보인다. 미·중 무역전쟁이 전방위로 격화돼 당분간 대외 여건이 호전될 가능성도 희박하다. 지속되는 내수 불황, 최저임금과 주 52시간 근로제 충격에다 수출 비중이 높은 반도체 D램 가격까지 올 들어 거의 반토막 났다.

정부는 ‘하반기 회복’을 예상했지만 그렇게 전망할 만한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한계기업들은 벼랑 끝에 매달려 있고, 잘나가던 대기업들도 비상경영에 들어갔다. 이대로면 올해 2%대 초반 경제성장도 버겁다는 분위기다.(…) 위기대책이 무차별 재정 확장정책뿐이라면, 먼저 일본이 처절하게 경험한 ‘잃어버린 20년’의 교훈부터 되새겨야 한다. 1990년대 거품 붕괴 이후 일본 정부는 경기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국민에게 직접 현금·상품권을 주고 도로 공항 등 SOC를 건설하는 데 1000조원 이상을 퍼부었다. 그러나 오진과 잘못된 처방의 결과는 저성장을 넘어 무(無)성장·역(逆)성장이었고, 남은 것은 일본식 ‘다람쥐 도로’, 세계 최장 현수교와 1990년 47%에서 지난해 233%로 치솟은 국가채무비율이다.

그런 일본 경제가 살아난 것은 아베노믹스의 ‘세 개의 화살’ 정책 덕이다. 아베 내각은 먼저 대담한 금융 완화와 적극적인 재정정책으로 출발했지만, 핵심은 세 번째 화살인 파격적인 규제 철폐였다. 수도권 입지까지 풀고 신산업은 ‘하고 싶은 것 다 해보라’는 수준의 정책 변화가 민간경제의 활력을 이끌어냈다.

지금 우리 정부는 1990년대 일본을 좇아가는 듯하다. 현금·지역상품권을 쥐여주는 온갖 복지수당, 예비타당성 조사도 면제해주는 지방 SOC 퍼주기 등이 일본의 복사판이나 다름없다. 이런 유의 ‘밑 빠진 독에 물붓기’는 내년 총선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국가경제와 미래 세대에는 독이 될 소지가 농후하다.

재정 확대가 효과를 내려면 무엇보다 기업활동의 족쇄부터 풀어줘야 한다. 수도권 규제든, 대·중소기업 차별 규제든, 신산업 규제든 파격적으로 검토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미 파탄 난 소득주도성장과 친(親)노동·친노조 기조를 유지한 상태에서 민간 활력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추경 중독’이 아니라 기업 의욕을 되살릴 정책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 <한국경제신문 6월 12일자>

사설 읽기 포인트
정부의 올바른 경제상황 인식 필요
재정부담 주는 추경은 최소화하고
시장경제 논리로 경제회복 유도해야


[한경 사설 깊이 읽기] 경제 살리려면 규제완화·투자활성화가 추경보다 급하죠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놓고 정부·여당과 야당 사이의 논쟁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 시기로만 본다면 올해는 물 건너갔고, 내년 예산에 반영하는 게 더 맞을 상황이다.

흥미로운 것은 청와대 등 정부와 여당의 논리다. 요약하면 ‘경제가 좋지 않은데, 경기를 살리기 위해 정부 지출을 확대하겠다는 추경 편성에 왜 동의해주지 않나’는 것이다. 그간 정부는 “우리 경제가 나쁘지 않다”고 주장해왔는데, 언제부터 나쁜 상황이라고 보고 있다는 것인가. 경기진단이나 상황인식에 변화가 있나 하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물론 ‘강원도 산불 피해 지원’ ‘미세먼지 대책 재원 마련’ 등으로 시작된 추경이 어떻게 ‘경기진작용’으로 바뀌었나 하는 의문도 남긴다.

더 근본적인 논쟁점은 연례 행사가 된 추경 예산으로 경제를 살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정부의 나라살림은 1년 단위로 수입(세수와 채권 발행)과 지출 규모를 정하고 국회 동의를 받아 집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 계획 외에 별도로 추경을 편성해서 ‘추가 지출’을 할 수는 있으나, 법(국가재정법)에 그 요건이 엄격히 제한돼 있다. 재정지출을 쉽게 마구 하지 말라는 취지다. 그러나 최근 연도 들어 추경 편성이 연례행사가 되면서 방만한 재정 집행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출은 계속 늘어나는데 세금은 걷히지 않는다’ ‘나랏빚 늘어나면 미래 세대는 어떻게 감당하나’는 식의 비판이 일차적이다.

나아가 ‘재정 확장정책’, 정부의 돈풀기가 경제살리기에 실제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이게 좀 더 본질적인 문제 제기라고 볼 수 있다. 불경기 때 재정 확장으로 불황산업을 지원하고, 전반적인 수요를 살리는 등 경기를 자극하면서, 연구개발 기반을 확대해 전체 산업의 생산성을 높여 미래 먹거리를 마련하는 것은 재정의 긍정적 기능이다. 불경기에는 더 요긴한 정책이다. 그런데 추경으로 더 지출하겠다는 지출 항목에 현금 살포성 선심정책이 다수 포함되는 등 불경기의 마중물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문제다.

일본 경제가 오랜 침체에서 되살아난 것도 막연한 돈풀기 덕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재정 확대에 기대지 않고도 투자 활성화를 유도하고 이를 통한 민간의 일자리 창출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기업 투자 유도를 위한 규제철폐, 노동시장의 유연성 강화 등 구조개혁, 글로벌 스탠터드를 적극 수용하는 경제·경영 환경 조성 등이 그 길이다. 다수 전문가들이 곧잘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전철을 밟게 된다”고 우려하지만, 정작 위험은 그런 것이 아니다. 재정도, 나라 경제도 모두 망가진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나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같은 국가처럼 곤두박질할지 모른다는 걱정이다. 장기 불황을 결국 이겨낸 일본만큼만 해도 크게 나쁘지 않다는 얘기가 된다. 이래저래 우리는 일본에 대해 너무 만만하게 말하고 평가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