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史 3000년 (12) 신라촌장적(新羅村帳籍)의 세상 (하)
비단을 생산·수출하고 어물 등과 거래했죠…토지·자원은 왕의 소유…왕토주의 생겨나
4개 촌이 생산한 비단은 연간 200필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촌민들은 그 상당 부분을 신라에 공납한 다음 나머지를 소금, 어물, 토기, 철기를 들고 촌을 찾아오는 상인에게 판매했다. 비단은 신라의 대외무역에서 인기 있는 수출품이었다.

신라의 대외 무역

필자는 4개 촌의 무성한 뽕나무 숲에서 그런 국제적 물류를 상상한다. 그 생태환경은 인구 과잉으로 산업이 곡작(穀作) 일변으로 찌그러진 15세기 이후와는 크게 구분되는 초기 농경사회의 그것이었다.

7세기 신라는 백성을 어떤 제도적 용어로 불렀을까. 중국에서는 호(戶)라고 했다. 신라도 그랬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장적 어디에도 호라는 글자는 단 한 차례도 보이지 않는다. 장적에서 확인되는 농가의 보통명사는 연(烟)이다. 중국의 호에 해당하는 것을 두고서는 공연이라 했다. 공연은 장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장적의 역사적 개성을 다른 무엇보다 뚜렷하게 상징하는 말이다. 공(孔)은 ‘크다’ 또는 ‘모으다’는 뜻이다. 곧 여러 개의 연이 모여 크게 된 것이 공연이었다. 어느 공연은 일부 연이 다른 곳으로 떠나자 해체되고 말았는데, 다른 어느 공연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공연이란 몇 개의 연이 분리의 가능성을 전제한 위에 무언가의 계기나 필요에 따라 결속한 상태, 곧 세대복합체를 말했다. 그 무언가의 계기가 생산과 공납을 위한 공동 노동임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그대로다.

중국은 호, 장적에는 연

공연에는 상상(上上), 상중(上中), 상하(上下), 중상(中上), 중중(中中), 중하(中下), 하상(下上), 하중(下中), 하하(下下)의 9개 등급이 있었다. 대개 인적 구성의 크기에 따라 일정한 등차로 구분한 등급이었다. 공연의 보유 토지를 고려했다는 설이 있는데, 인구에 비해 토지가 너무 풍부한 시대라서 취할 바가 못 된다. 최고의 상상 공연은 성인 남녀 20∼22명, 최하의 하하 공연은 성인 남녀 4∼5명의 인적 구성이었다. 개별 세대 연의 인적 구성을 성인 남녀 2명으로 치면, 상상은 개별 세대 10∼11개의 결합을, 하하는 개별 세대 2∼3개의 결합을 가리켰다. 4개 촌은 그리 부유한 곳은 아니었던지 중하, 하상, 하중, 하하의 네 등급만 있었다.

계연은 각 등급에 가중치를 부과한 다음 각 등급의 공연 수를 곱해 산출됐다. 가중치는 상상은 9/6, 상중은 8/6, 이렇게 1/6의 등차를 두어 하하가 1/6이 되는 수열(數列)이었다. 장적에서 맨 먼저 나오는 촌의 경우 중하 공연이 넷, 하상 공연이 둘, 하하 공연이 다섯이었다. 그러면 계연은 4×4/6, 2×3/6, 5×1/6을 합해 4.5가 됐다. 두 번째 촌은 4.3, 세 번째 촌은 알 수 없고, 네 번째 촌은 1.8이었다. 그렇게 산출된 계연은 각 촌의 경제력을 종합적으로 대변하는 가운데 신라가 각 촌에 설정한 공동부담의 과표로써 역할을 했다.

장적은 개별 세대 연이 보유한 토지를 가리켜 ‘연수유’(烟受有), 곧 “연이 받아 가진 것”이라고 했다. 농민의 경지는 국가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뜻이다. 전국의 토지를 왕의 소유로 간주하는 관념은 삼국의 발전 과정과 궤를 같이했다. 414년의 고구려 광개토왕비문에 ‘태왕국토(太王國土)’라는 구절이 있다. 고구려의 강역을 태왕 광개토왕의 은택과 덕화가 미치는 공간으로 간주하는 정치이념의 표현이었다. 같은 구절은 5세기 중엽에 세워진 중원고구려비에도 등장하고 있다. 전국의 토지와 자원을 왕의 소유로 간주하는 사상은 신라 진평왕 대에 이르러 뚜렷하게 확인된다.

삼국의 왕이 대왕으로 변신

608년 진평왕은 수(隋)의 황제에게 고구려의 정벌을 청원하는 글을 짓도록 원광법사에게 명했다. 그에 대해 법사는 남의 나라를 멸망시켜 달라는 부탁이 불교의 올바른 도리가 아니지만 “대왕의 토지에 살면서 대왕의 물과 풀을 먹고 있으니 감히 어찌 명을 좇지 아니하오리까”라고 하면서 그에 응했다. ‘물과 풀’은 유목민족이 토지의 풍요로움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장적도 인구와 가축의 수를 먼저 파악한 다음 토지에 대해 기록했다. 전술한 대로 당시까지만 해도 수렵, 목축, 양잠, 무역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한 초기 농경사회였다. 어쨌든 삼국의 발달과 상호 충돌 과정에서 삼국의 왕은 귀족회의의 장로에서 전국의 토지와 자원을 지배하는 대왕(大王)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이후 8∼14세기의 한국사를 특징짓는 왕토주의(王土主義)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비단을 생산·수출하고 어물 등과 거래했죠…토지·자원은 왕의 소유…왕토주의 생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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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발달과 상호 충돌 과정에서 삼국의 왕은 귀족회의의 장로에서 전국의 토지와 자원을 지배하는 대왕(大王)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이후 8∼14세기의 한국사를 특징짓는 왕토주의(王土主義)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