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해치는 표현들 (15)

'양해'는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예문은 정부가 국민에게 말하는 상황이다.
국민이 양해할 일을 정부가 한 꼴이니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양해는 '드리는' 게 아니라 '구하는' 거죠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양해는 '드리는' 게 아니라 '구하는' 거죠
지난 몇 회에 걸쳐 언어에 내재한 논리적 구조에 대해 살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왕왕 언어의 논리성을 무시한다. 이것은 지력의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논리적으로 말하고 쓸 때 합리적·과학적 사고 능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반대로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사람이 말을 비논리적으로 할 까닭이 없는 이치와 같다.

“양해 말씀 드립니다”는 의미상 성립 못 해

“재판 결과 혹은 법관의 인사 문제는 삼권분립을 훼손할 소지가 있어 청원 답변에 한계가 있다는 점 거듭 양해 말씀 드리면서 답변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지난 3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청원에 답변하는 원고(청원답변 79호)가 올라왔다. 여기에도 이치에 맞지 않는, 어색한 곳이 하나 있다. ‘양해 말씀 드리면서’ 부분이 그것이다.

‘양해’는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누군가 이 말을 썼다면 말하는 이가 어떤 문제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 된다. 예문은 정부가 국민에게 말하는 상황이다. 국민이 양해할 일을 정부가 한 꼴이니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말씀’은 남의 말을 높여 이를 때도, 자기의 말을 낮춰 이를 때도 쓴다. 양쪽으로 다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에서는 ‘남의 말’을 높인 주체존대 문장이다. “제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에서는 ‘자신의 말’을 낮춘 상대존대에 쓰였다. “철수야, 선생님한테 꼭 말씀드려라”에서는 화자가 아니라 철수를 낮춘, 객체존대형이다.

그러면 ‘드리다’의 경어법상 정체는 뭘까? “철수가 동생 영희한테 저녁을 차려주었다”란 문장을 통해 이를 자세히 알아보자. 예문은 평어법으로 쓴 문장이다. 높낮이가 드러나지 않는 중립 상태다. 이를 ①“철수가 영희한테 저녁을 차려주었습니다”라고 하면 상대존대다. 듣는 이를 높인 것이다. 서술어미 ‘-습니다’로 실현됐다. ②“어머니께서 영희한테 저녁을 차려주셨다”에서는 행위의 주체, 즉 문장 주어를 높였다. 이를 주체존대라고 한다. 주격조사 ‘-께서’와 선어말어미 ‘-시’가 주체존대 표지다.

말에 담긴 논리적 구조 무시하면 안 돼

만약 ③“철수가 어머니께 저녁을 차려드렸다”라고 했다면 객체존대다. 행위가 미치는 대상, 즉 객체인 ‘어머니’를 높인 것이다. 하대나 평대라면 조사 ‘-에게’를 썼을 텐데 겸양을 나타내기 위해 ‘-께’로 바뀌었다. 여기에 동사 ‘주다’ 대신 ‘드리다’를 썼다. 이 ‘드리다’는 ‘주다’를 객체존대한 표현이다. 경어법에서 객체존대(엄밀히는 겸양법이다)는 이 외에 ‘묻다/말하다→여쭙다, 보다/만나다→뵙다, 데리고→모시고’ 등 일부 동사를 통해 주로 실현된다.

그러니 ‘양해 말씀 드리다’라고 하면 ‘양해를 주겠다’, 즉 ‘내가 너를 양해하겠다’는 뜻이 된다. 이는 문맥상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말하는 이가 자신을 낮추면서 상대방을 높이려면 ‘양해 말씀’이 아니라 “사과 말씀 드립니다”라고 해야 한다. 굳이 ‘양해’를 쓰고 싶다면 “(당신의) 양해 바랍니다(또는 ‘구합니다’)”라고 하면 된다. 양해는 드리는 게 아니라 바라거나 구하거나 얻는 것이다.

“만 원이십니다”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 “양해 말씀 드립니다” 같은 표현은 존대의 대상에 대한 인식적 오류 결과다. “만 원입니다” “말씀이 있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로 해야 할 것을 이상하게 비틀어 썼다. 말의 논리성과 어법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것이 오류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그냥 습관적으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