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4차 산업혁명과 혁신기업

미국에서 혁신적 기업이 많은 이유는
저항정신으로 시작된 상상력이
기업활동을 통해 구체화됐기 때문
[4차산업혁명 이야기] 미국의 혁신기업들은 기술과 문화의 결합으로 탄생했죠
4차 산업혁명의 중심에 있는 기업들은 모두 미국에서 탄생했다. 매일 사용하는 검색엔진과 지메일을 제공하는 구글이 미국 기업이고, 오늘날 소통을 위한 필수 앱(응용프로그램)을 개발한 페이스북과 트위터 역시 미국 기업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다는 제프 베이조스의 아마존 역시 미국 기업이며, 이 모든 활동을 모바일 환경에서 가능하도록 한 애플이 미국 기업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여기에 미국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 스카이프까지 포함하면, 오늘날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서비스가 미국 기업에 의해 제공된다는 점에 새삼 놀라게 된다.

대항문화와 혁신의 출현

[4차산업혁명 이야기] 미국의 혁신기업들은 기술과 문화의 결합으로 탄생했죠
2005년 봄,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스티브 잡스가 연설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말은 “갈망하라,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였다. 이는 사실 1968년 발간된 잡지 《Whole Earth Catalog》의 폐간호 뒤표지에 실린 문장이었다. 《Whole Earth Catalog》는 히피들의 의식, 자연으로 회귀해 꾸린 히피들의 공동체 생활을 돕는 정보 및 상품을 소개하는 잡지였다. 스스로 히피였음을 밝힌 잡스는 이 잡지를 ‘히피들의 성서’라고 소개할 만큼 높이 평가했다.

히피들을 타깃으로 한 발간물이 일반 독자에게도 유명했던 배경에는 1960년대의 대항문화가 존재한다. 대항문화란 196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있었던 일련의 운동을 총칭하는 용어다. 히피 문화를 포함해 마약, 언론자유 운동, 소비자 운동, 흑인시민권 운동, 여성 운동, 게이 해당 운동, 베트남 참전 반대 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젊은이들은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지향하는 대기업 관료제 안에서 부품처럼 사는 삶에 저항했고, 냉전시대에 점차 현실화하는 핵전쟁으로 인해 인류가 파멸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살았다. 이런 저항과 불안감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고, 이는 혁신의 씨앗이 됐다. 《Whole Earth Catalog》의 발행인 스튜어트 브랜드는 1995년 <타임>지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는 모두 히피에게 빚을 졌다’는 표현을 통해 오늘날 미국의 혁신은 1960년대 대항문화의 산물이라고 설명했다.

대항문화의 쇠퇴와 혁신기업의 탄생

김동영 
KDI 전문연구원 
kimdy@kdi.re.kr
김동영 KDI 전문연구원 kimdy@kdi.re.kr
1970년대가 시작되자 기존 것에 대한 저항은 갈 곳을 잃는다. 저항의 전제인 대립적 세계관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의 철수로 반전운동이 사라졌고, 중국과의 국교 회복으로 반공 이데올로기도 설 자리를 잃었다. 이뿐만 아니라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인해 경기가 어려워지자 1960년대의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형성된 저항도 동력을 잃었다. 대항문화의 주역은 백인 중산층 자녀들이었다. 이제 이들은 저항을 외치는 대신 생계를 위해 사회에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1970년대의 사회·경제적 변화는 잠재돼 있던 혁신의 씨앗이 싹을 틔우는 계기가 됐다. 저항정신을 간직한 서부의 젊은이들을 실리콘밸리로 모여들게 만들었고, 이들의 저항정신이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의 주역들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됐다.

이후 기본 철학이 완전히 상반된 서부와 동부 기업들의 경쟁이 시작됐다. 동부의 기업들은 20세기 초반부터 자유경쟁에서 승기를 잡으면서 강력한 지위를 확보한 거대기업들이었다. IBM, AT&T, 제록스,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으로 대표되는 동부 기업들은 관료제 문화를 바탕으로 효율성의 극대화를 추구하며 번영을 누렸다. 반면 동부의 기존 문화 질서에 저항하며 히피 문화를 주도하던 젊은이들이 세운 서부의 기업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중시함으로써 보다 인간적이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네트워크와 커뮤니티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이들은 1980년대 초의 컴퓨터 전쟁에서 동부 기업들을 쓰러뜨리면서 미국 경제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상상력과 구상력의 조화

서부의 다윗이 동부의 골리앗을 쓰러뜨리면서 열리기 시작한 실리콘밸리의 전성기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상상력과 구상력이 그 원동력이다. 현실에 없는 것을 생각하는 능력이 상상력이고, 수요자의 필요와 공급자의 상상력을 조화시키는 능력이 구상력이다. 저항정신에서 시작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이 이상향을 상상하는 작업이었다면, 1970년대부터 시작된 이들의 기업활동은 이를 현실화하려는 노력이었다. 오늘날 우리 손에 들려 있는 태블릿 PC는 1972년 ‘다이나북’이라는 이름으로 상상이 현실화된 결과물이며, 클라우드 컴퓨팅은 1980년대 썬마이크로시스템즈 공동 설립자인 빌 조이의 네트워크 컴퓨팅이라는 상상이 구현된 결과다. 상상과 구상은 결코 무에서 창조되지 않는다. 다양한 계기와 영향, 맥락이 있어야 비로소 날개를 펼칠 수 있다. 많은 혁신이 미국에서 탄생한 이유를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찾아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