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史 3000년 (7) 국가의 성립 (상)
2004~2008년 경남 창녕군 송현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마구(馬具)와 무구(武具)를 비롯한 많은 부장품이 출토된 가운데 제15호 고분에서는 순장(殉葬)을 당한 4명의 유골이 나왔다. 2명은 남자, 2명은 여자였다. 순장의 추정 연도는 420~560년이다.

창녕 고분과 순장

경남 창녕 고분에서 출토된 순장 유골(왼쪽)과 복원 모습.
경남 창녕 고분에서 출토된 순장 유골(왼쪽)과 복원 모습.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그중 유골 상태가 온전한 인물의 생시를 복원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나이는 16세, 키는 154㎝, 출산을 경험한 적이 없는 소녀였다. 평평한 얼굴, 큰 광대뼈, 찢어진 눈매 등에서 현대 한국인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금동 귀고리를 하고 있어서 천한 신분은 아니었다. 소녀의 이 몇 개는 충치인데,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 종아리뼈와 정강이뼈에는 충격이 반복해서 가해진 흔적이 있다. 이로부터 소녀는 주인 앞에서 오랫동안 무릎을 꿇었던 시종이었다고 짐작된다.

4명의 순장자가 무엇을 섭취했는지는 인골에서 추출된 콜라겐에 대한 탄소 및 질소 안정동위원소 분석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탄소 열량으로 쌀, 맥류, 두류, 견과류 등 C3계 식료를 주로 섭취했다. 제1회에서 지적한 대로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기장, 조, 피, 수수 등 C4계가 주요 식료였다. 이로부터 철기 보급과 함께 농사의 중심이 쌀, 맥류, 두류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단백질원과 관련해 2명의 남자는 주로 동물 단백질을, 2명의 여자는 주로 식물 단백질을 섭취했다. 이 같은 현상은 다른 유적에서 나온 인골 분석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로부터 5~6세기까지도 남자는 수렵에 종사하고 농사는 주로 여자가 담당한 초기 농경사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지나친 억측일까.

신라는 502년 순장 금지

순장은 북방계 청동기 문화에 그 기원이 있으며, 한반도에서는 신라와 가야의 유적에서 확인된다. 순장은 사람이 사후에도 현세의 신분으로 영생한다는 자연종교의 단순한 정신세계를 반영한다. 보편종교, 율령, 관료제, 조세제도의 성립과 더불어, 다시 말해 문명과 국가의 시대가 열리면서 순장의 풍습은 폐지됐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왕이 죽으면 남녀 각 5인을 순장했는데, 502년 지증왕(智證王)이 이를 금지했다.

전회에서 강조한 대로 2~5세기 한반도 각지에서 무리지어 생겨난 국(國)은 족장사회(chiefdom)에 해당했다. 한국사에서 국가(state)는 4세기 이후 여러 국이 패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출현했다. 족장사회의 전개와 국가의 성립은 일정한 시차를 두고 병행했다. 후술하듯이 초창기의 국가 체제는 여전히 족장사회 특질을 강하게 보유했다. 국가로 이행하는 데 성공한 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 한정됐다. 가야는 그 문턱에서 좌절했다. 국가의 성립에는 자연, 자원, 교통, 국제 관계와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4~6세기 한반도는 크게 열려 있었으며, 그 같은 환경에서 삼국의 성립과 발전은 국제적 과정이기도 했다.

220년 한(漢)이 망한 뒤 중국은 남북조 시대의 혼란에 접어들었다. 그 와중인 313년에 한 군현이 고구려에 의해 쫓겨났다. 한 군현의 남부 영역과 그들이 주도한 국제적 교역로는 백제의 차지가 돼 백제를 번성케 했다. 360년께 백제는 왜와 접촉해 교역을 개시했다. 373년 백제는 남조의 동진(東晉)과 조공 관계를 맺고 불교를 수용했다. 396년 고구려가 남하해 한강 이북의 백제 영토를 빼앗았다. 위기에 몰린 백제는 왜(倭)에 인질을 보내 도움을 구했다. 백제와 왜의 이 같은 관계는 이후 백제 멸망까지 250년간이나 이어졌다.

4세기 대국은 고구려

4세기 말 만주와 한반도의 패자(者)는 고구려였다. 392년 왜가 가야와 협동해 신라를 침공했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고구려는 군사 5만 명을 파견해 왜군과 가야군을 대파했다. 이후 가야와 그의 연맹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으로 낙동강 동쪽의 가야를 흡수했다. 가야 연맹의 지배세력과 장인(匠人) 집단은 대거 왜로 이주했다. 왜는 그들을 도래인(渡來人)이라 불렀다. 왜의 중심부에는 도래인 기지가 형성됐다. 도래인을 통해 전해진 한반도 문화는 왜의 정치와 경제를 새롭게 하는 충격이었다. 동시에 한반도 남부와 왜의 관계는 한층 긴밀해졌다.

주인과 함께 묻는 순장은 북방계 청동기문화, 고구려·신라·백제만 국가로 성장…가야는 좌절
■기억해주세요

2004~2008년 경남 창녕군 송현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마구(馬具)와 무구(武具)를 비롯한 많은 부장품이 출토된 가운데 제15호 고분에서는 순장(殉葬)을 당한 4명의 유골이 나왔다. 2명은 남자, 2명은 여자였다. 순장의 추정 연도는 420~560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