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해치는 표현들 (12)

'아닌'과 '아니라'를 구별하기 위해
특별히 문법적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모국어 화자라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아닌'과 '아니라'의 차이
이동통신 3사가 지난 1일 세계 최초로 5세대(5G) 상용 전파를 송출하며 ‘5G 시대’ 개막을 알렸다. 한 회사는 곧바로 5G 첫 가입자를 선정해 발표하기도 했다. 언론에서도 앞다퉈 관련 보도를 쏟아냈다. 그중 주목할 만한 문구가 하나 있었다. ‘5G 1호 가입자는 사람 아닌 로봇.’

‘아니라’ 써야 할 곳에 ‘아닌’ 남발해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아닌'과 '아니라'의 차이
기사에서도 십중팔구 이런 식의 문구가 이어졌다. 사람 아닌 로봇? 이게 가능한 표현인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겠는데…. 하지만 아무래도 어색하다. 이런 식의 표현은 다양한 상황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얼마 전 치킨 가격이 화제가 됐을 때다. “치킨 가격이 다시 들썩인다. 페리카나 등은 최근 가맹본부가 아닌 가맹점주 주도로 메뉴 가격을 1000~2000원씩 올렸다.” ‘가맹본부가 아닌 가맹점’은 또 무슨 말일까? 가맹본부인 가맹점이 따로 있나? 그렇다면 말이 되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별 탈 없이 이런 말을 흔히 쓴다. 언제부터인지 이런 표현이 급속히 늘어 우리말글을 시달리게 하고 있다. △자율주행차는 이제 미래가 아닌 현실 속의 이야기다. △그는 안보전문가가 아닌 통상전문가다. △내일 행사에는 대통령이 아닌 국무총리가 참석할 예정이라고 한다.

말로 할 때는 “미래가 아니라 현실이야”라고 한다. 이를 “미래가 아닌 현실이야”라고 하는 게 요즘 글쓰기 실태다. 나머지도 모두 ‘A가 아니라 B’로 써야 할 문구다. ‘아닌’과 ‘아니라’를 구별하기 위해 특별히 문법적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모국어 화자라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집합 관계를 따지는, 약간의 수학적 개념이 더해진다면 더 분명해진다.

논리적으로 써야 문장 구성 탄탄해져

‘A 아닌 B’는 A가 B에 포함되는 개념일 때, 즉 A가 B의 부분집합일 때 가능한 표현이다. “그는 여행지를 고를 때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곳을 주로 찾는다.” “피델 카스트로는 생전에 왕족 아닌 인물로는 세계 최장기 집권을 기록했다.” “한반도는 전쟁도, 평화도 아닌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예에서 ‘아닌’은 안긴 문장을 구성한다. ‘A를 빼고 나머지 다른 무엇’을 나타낸다. 이때 ‘무엇’ 자리는 당연히 A를 포함하는 더 큰 개념이다. 이를 통해 정상적인 관형절을 구성하는 것이다.

‘아니라’는 앞말과 뒷말이 대조적임을 나타내는 연결어미다. A와 B가 독립된 부분집합이다. “그 일은 철수가 아니라 영희가 한 거야”를 보면 잘 드러난다. 많은 사람이 이를 “철수가 아닌 영희가 한 거야” 식으로 잘못 쓴다. 이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표현이다. 이런 왜곡된 어법이 생기는 까닭은 명사구(‘관형어+명사’꼴)를 남발하는, 잘못된 글쓰기 습관 탓도 있을 것이다. “태양광 전력 생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라고 해야 할 것을 “적극적인 태양광 전력 생산에 나섰다”처럼 쓰는 식이다. “향후 정책에서는 분명하게 선을 긋겠다”는 “향후 정책에서는 분명한 선을 긋겠다”로 왜곡된다.

관형어를 자주 쓰면 필연적으로 명사구가 많아지고 이는 문장을 비트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부사어를 써야 동사가 살아나고 글에 운율이 생긴다. ‘A가 아니라 B’라고 하는 게 원래 우리 말법이다. ‘아닌’으로 연결해도 대충 뜻이 통한다고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표현을 방치하면 자칫 우리말글 체계를 흔드는 불씨가 될지 모른다. 말과 글을 논리적이고 정교하게 쓰려는 인식과 교육이 필요한 까닭이기도 하다.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