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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598호 2018년 6월 11일

문학이야기

[문학이야기(19)] 정극인 《상춘곡》


세조의 즉위와 최초의 가사 탄생

상춘곡. 최초의 가사로 인정받는 작품이다. 봄을 맞아 경치를 구경하며 즐기는 노래를 뜻한다. 정극인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태인으로 내려와 제자를 키우는 일에 힘을 쏟았다. 상춘곡은 이때 지은 작품으로 홍진(紅塵), 즉 세속에서 벗어나 자연에 묻혀 사는 즐거움을 형상화한 강호가도이자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이어지는 호남가단 형성의 계기가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묘사는 생생하고 표현은 화려해 봄의 고갱이를 즐기는 화자의 흥이 손에 잡힐 듯하다. 화자의 흥취는 도화, 행화, 녹양방초, 수풀 속 우는 새에서 비롯돼 답청(파랗게 난 풀을 밟으며 산책함), 욕기(물놀이), 채산(나물 캐기), 조수(낚시)에서 고조되며 술을 마시는 시냇가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이 사대부는 시냇가에서 술을 마신다. 막 익은 술을 갈건(술을 거르는 두건)으로 걸러 놓고 꽃나무 가지를 꺾어 잔 수를 세면서 먹는다. 술을 마시되 속되지 않게, 한 잔 두 잔 거듭하되 운치 있게 마신다. 술이 왜 풍류를 즐기는 방법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주로 답답한 사각의 공간에서 대체로 화학주를 들이켜는 현대인의 음주와는 격이 다르다. 술잔에 가득한 청향, 옷에 떨어지는 붉은 꽃잎, 시냇물에 떠내려오는 복숭아꽃, 무릉이 바로 저기니 자연과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달하는 것은 당연지사라 하겠다.


아름다운 자연은 나의 벗

이 작품에서 시상은 화자의 시선 이동, 또는 공간 이동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 수간모옥(몇 칸짜리 초가)에서 시작해 들판으로, 들판에서 시냇가로, 시냇가에서 다시 산봉우리로 화자의 시선은 이동하고 있다.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속세와 가까운 세계에서 먼 탈속의 세계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니 시상의 전개는 곧 화자의 지향의 전개이다. 탈속의 세계에 도달한 화자는 <공명도 나를 꺼리고 부귀도 나를 꺼리니 아름다운 자연 외에 어떤 벗이 있을까. 가난한 처지에 헛된 생각 아니하네. 아무튼 한평생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이만하면 족하지 않은가?> 라고 노래를 끝맺는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문학 작품 속에서 자연은 현실 정치에서 뜻을 펴지 못할 경우 속세에서 물러나 심신을 닦는 공간이자 무릉도원 같은 이상향으로 그려진다. 홍진이 부귀공명을 누리는 공간이라면 자연은 학문을 닦고 풍류를 즐기는 공간이다. 그래서 후세의 우리는 사대부들의 자연 예찬에 공감하면서도 그 예찬의 이면에 숨은 그들의 좌절과 상처를 생각한다.

이 가사 작품을 볼 때 동명의 단편소설 ‘상춘곡(윤대녕, 1996년)’을 떠올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주인공 ‘나’는 선운사에서 만나 깊은 인연을 맺었다가 헤어진 여인을 우연히 다시 만난다. 여인은 벚꽃이 필 때 다시 보자고 했고 ‘나’는 선운사에 미리 와서 벚꽃의 개화를 기다린다. 그러나 벚꽃은 피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쳐 선운사를 떠나려던 ‘나’는 선운사 내의 목조건물 만세루에 얽힌 사연을 듣게 된다. 만세루는 고려 때 불탔는데 다시 지으려니 재목이 없어서 타다 남은 것을 조각조각 이어서 만들었는데 그것이 다시없는 걸작이 됐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선운사로 돌아와서 어느 기둥 하나 온전한 것이 없는 만세루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마치 기적처럼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하얗게 흐드러진 벚꽃의 무리를 본다. ‘나’는 이제 여인을 만나고자 개화를 기다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와 여인이 ‘멀리서 얘기하되 가까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들이’ 됐으며 ‘마음 흐린 날 서로의 마당가를 기웃거리며 겨우 침향내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된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불에 타 무용해진 나무 조각들이 걸작 만세루의 재료가 됐다는 사실은 불에 탄 옛날을 품고 사는, 관계에 상처받고 좌절한 사람들을 치유한다. 아마도 ‘나’는, 숱한 ‘나들’은 숯이 된 과거를 굳이 놓으려 하지 않고도 살아갈 힘을 얻었으리라.

치유의 공간

윤대녕의 상춘곡에서 위로와 치유의 공간은 만세루이다. 정극인의 상춘곡, 그리고 현실에서 좌절한 사대부들의 상춘곡들에서 위로와 치유의 공간은 아마도 자연이었을 것이다. 수양과 흥취와 풍류와 탈속의 공간, 그리고 홍진에서의 기억을 억지로 지우려 하지 않아도 이상적 삶으로서의 안빈낙도를 꿈꿀 수 있던 공간. 살아가는 시공과 정신세계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전 사대부들의 삶의 지향에 그럭저럭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 역시 각자의 삶에서 어떤 식으로든 좌절하고 또 어떤 식으로든 위로를 구하는 그런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서울사대부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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