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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596호 2018년 5월 28일

문학이야기

[문학이야기(17)] 《한림별곡》


고려가요가 고려 민중의 노래라면 경기체가는 고려 귀족의 노래다. 위 작품은 최초의 경기체가인 한림별곡이다. 한림별곡은 한림제유, 즉 왕명을 받들어 문서를 꾸미는 관청이었던 한림원의 선비들이 부른 노래다. 전 8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시부(문장가와 시인의 문장 찬양), 서적(학문 수련과 독서의 자긍심 찬양), 명필(유명한 서체와 명필 찬양), 명주(귀족의 주흥과 풍류 찬양), 화훼(화원의 경치 노래), 음악(흥겨운 주악에 대한 취향 노래), 누각(후원의 경치 노래), 추천(그네 뛰는 정경과 풍류 찬양) 등을 소재로 당시 선비들의 생활을 노래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이 노래의 표현상 특징은 나열이다. 즉, 시적 대상을 나열하거나 제시하면서 흥취를 시구 ‘경(景) 긔 엇더니잇고’로 영탄하고 있다. 경기체가라는 명칭은 이 시구에서 비롯됐다. 나열과 영탄의 반복이니 시적 기법은 몹시 단순하다 하겠다. 한림제유는 이 시가를 인간 본연의 감정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들의 목적은 사랑하는 소재를 찬양하면서 자신들의 능력과 기개를 과시하는 데 있는 것 같다.


제1장을 풀이해 보자. <유원순의 문장, 이인로의 시, 이공로의 사륙변려문, 이규보와 진화의 쌍운을 내어 빨리 짓는 시, 유충기의 대책문, 민광균의 경서 풀이, 김양경의 시와 부. 아, 시험장의 광경, 그것이 어떠합니까?>

이 시가의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특징은 ‘물(物)’의 소재화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물을 소재로 삼은 것은 추상적인 ‘의(意)’를 노래한 이전의 문학적 관습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한림별곡을 비롯한 경기체가의 이런 특징은 이 노래의 주된 창작자인 신진사대부의 존재적 특성에서 비롯된다. 신진사대부는 기존 기득권층인 권문 세족에 반발해 등장하였다. 학문적 소양이 높고 행정 실무에 밝은 관료적 문인으로서 무신 정권 때 등용돼 무신들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였다. 가문이 한미한 지방 향리 출신이 많았는데 고려 후기에 접어들며 중소지주 계층으로 성장하였고 무신 정권의 붕괴 후 활발히 중앙정계에 진출하며 더욱 힘을 키웠다.

사회의 새로운 주류 세력이 되고자 했던 그들은 심(心)과 리(理)보다 물(物)을 중시하였고 내면보다 외부에 치중하였는데 호탕하게 사물을 호명하는 경기체가의 형식은 그들의 진취성을 담기에 딱 들어맞는 그릇으로 보인다.

한편 특유의 향락적 기풍 역시 경기체가의 큰 특징이다. 한림별곡은 『악장가사』에 수록되어 궁중 음악으로 연주되었을 뿐 아니라 귀족의 연회에서 널리 애창되었다. 1479년 『조선왕조실록』에는 성종이 술과 앵무잔을 승정원과 홍문관에 하사하며 한림별곡에 앵무잔이니 호박배니 하는 말이 있으니 한림들이 술잔을 돌려서 술을 많이 마시고 헤어지라고 전교했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의 문신 이행의 『용재집』에는 이행이 1520년 증고사 자격으로 호남 지역을 갔을 때 전주부윤이 마련해 준 술자리에서 흥이 최고조에 이르자 관료와 기생이 모두 일어나 한림별곡을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한림별곡이 창작된 것이 13세기 초 고려 고종 때로 추정되니 근 200년 동안이나 귀족의 연회에서 사랑받았음을 알 수 있다. 흥이 최고조에 올랐을 때 ‘떼창’을 했다 하니 연회의 ‘끝판왕’이었던 셈이다. 시가를 인격 수양과 학문 연마의 수단으로 여긴 퇴계 이황이 한림별곡류가 교만하고 방탕한 기풍을 지녔고 남녀가 비루하게 희롱하며 어울린 점이 마땅하지 않다고 비판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한림별곡은 유희로서의 문학이라는 소중한 미덕을 갖는다. 문학은 인간을 탐구하는 예술이다. 인간은 고귀한 한편 비천하다. 인간은 이념을 찾는 한편 놀이에 취한다. 언어 예술로서의 문학은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동시에 언어의 놀이터로 기능한다. 고려 말 발생하여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조까지 근 350년 동안 귀족 시가로 생명을 영위하며 사대부의 놀이이자 이념의 그릇이었던 경기체가에 대한 연구가 더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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